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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프라미스 - Eastern Promis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