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길 - Hosu-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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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물이 되버린, 지금 여기 존재하는 어딘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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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길 - Hosu-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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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게 진행되는 다큐멘터리라 생각했다.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늘어선 연립들을, 양 옆에 펼쳐진 집들 사이에 난 길을 고정된 카메라는 몇 분간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 전환. 길 아래로 어떤 할머니가 힘겹게 내려간다. 카메라는 그 뒷모습을 무리한 줌으로 당겨서 찍는다. 너무 당기다 못해,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다시 거칠게 화면 전환. 다시 아까 그 연립. 이번에는 밤이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연립의 5층에는 유일하게 불켜진 창문이 보인다. 카메라는 다시 말없이 그 불켜진 창문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불켜진 창문에서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화면 전환. 이번에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주 오래, 지치지 않고 뛰어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카메라는 그 아이들을 비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일이 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도 불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경사진 길을 아이들은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리고 웃으면서 쫓고 쫓긴다. 쫓겼던 아이들이, 쫓기 시작하고, 쫓았던 아이들이, 쫓기기 시작한다. 계속 웃으면서. 여전히 줌은 반복된다.


그리고, 영화는 급속히 후반부로 넘어가 버린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몇몇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 결정적인 몇몇의 차이점. 영화 후반부에는 예의 그 줌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기는 한다. 바로 조금 전의 장면에서만 해도 사람을 경계하며 움직이던 고양이의 사체. 그 줌 된 화면속에 사체 위로 날파리들만 어지럽게 움직인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양이 뿐만이 아니다.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할머니와 아이들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장면. 다시 어둠 속이다. 이제 더 이상 불켜진 창문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암흑 속에서 오로지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나 이 개 짖는 소리마저도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아니, 나의 착각인가. 암흑 속에서 개 짖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리니까 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에서 문이 쾅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일까. 그리고 계속 모든 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아니. 움직이는 것은 있다. 더 이상 줌 하지 않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계. 물론 이것은 잘못된 진술이다. 기계 같은 것이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지붕을 무너뜨리고, 건물벽을 부수는 저 기계는 실제로 이 마지막에서 '마치 산 것처럼' 움직이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질문이 생긴다. 저 기계 외에, 살아 움직이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까지가 이 영화 <호수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괴이하게 느껴졌던 이 처음의 장면들이 마지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줌들을 보고나서야 마지막에 질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다시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아마도 그 줌들은 '이 아이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아이들을, 노인들을,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감독의 필사적인 외침을, 그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이는 줌은 담고 있다. 그리고 물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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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거의 기교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을 마지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켜켜이 장면들을 쌓는 영화다. 그 줌의 활용은 물론이거니와, 사운드의 활용 역시 심상치 않다.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점을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후반부에 들어서 사운드와 화면과의 불일치가 심해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암흑 속에서 개의 짖음과 같이 특정의 사운드가 증폭되기도 하고, 화면과 전혀 상관없는 효과음이 느닷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불꽃의 이미지를 슬며시 끼워넣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에 묘한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그 공간을 매우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고, 아주머니들이 잡담을 나누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 그 공간들은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거대한 유령처럼 변하여 관객들을 습격한다. 공간은 순식간에 곧 무엇이라도 나타날 듯한 이상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 유일하게 기계는 살아 꿈틀대며, 조금씩 폐허를 확장해 나간다.

평론가 허문영은 지아장커 감독의 말을 빌려, 다큐멘터리를 두 종류로 나눈 바 있다. 그 하나는 기다림(wa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리고 지아장커가 구축의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문영은 덧붙인다. "이 말은 적어도 지아장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 <호수길> 역시 굳이 나누자면 구축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줌들의 활용이나, 사운드와 화면의 불일치, 혹은 끼어든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픽셀이 무너질 정도의 줌으로 아이들을 잡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화면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진다. 놀이터의 노는 아이들을 잡는 장면들에서 아이들을 잡는 크기는 그대로인데, 화면은 깨끗해졌다. 좋은 카메라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카메라가 훨씬 더 대상 가까이로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카메라로 다가와서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것의 의도는 사실 명백하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의 대상이 처음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심리적으로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분명히 영화 처음의, 멀리 줌으로 잡은 장면들보다 관객들을 그 아이들에 더욱 가깝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그 다음 장면들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에 관객들이 가지게 될 감정은 거의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의 대상보다 기록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시 지아장커의 말을 상기하자.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즉,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기록하는 자의 태도, 혹은 위치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몇 번이나 '우리 동네'라는 말을 썼다. 감독은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그 동네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감독은 그 동네의 주민이었다. 은평구 응암 2동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동네. 다른 어떤 설명을 가타부타 붙일 필요 없이 이 영화는 우리 동네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동네의 모든 집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은평구 응암 2동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호수길'도 존재할 것이고, 어쩌면, 그 길 옆에는 진짜 인공호수라도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 동네를 더 이상 '호수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더 이상 '우리 동네'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밀하게 축조된 마지막의 SF적인 공포는 아마도 감독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덧붙였다. 그 마지막의 불꽃 이미지는 그냥 '악!'같은 거라고. 그 비명. 악, 악, 아악.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말했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를 찍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 우리는 어쩌면 이 기이한 낯선 다큐멘터리를 이런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한 가운데에 거대한 기계를 던져 놓고 그것을 조종해 집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서 어디론가로 보내졌고 기이한 표정없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난 집들을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곧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 좋은 영화를 보게 해주신 인디포럼 및 알라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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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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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감상을 방해할, 심각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유령 작가(Ghost Writer)란, 유명인의 뒤에서 유명인의 이름으로 글을 써주는 대필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활용한 영국식 유머가 등장한다. 영화 내내 본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본인을 유령이라고 소개하는 장면. 이 유령작가는 전 영국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전임 유령작가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려 고용되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유령작가는 이중의 유령인 셈이다. 전면에 나온 아담 랭의 유령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임 작가의 유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유령작가가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미지의 장면을 찾아가는 장면은 꽤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보였다. 죽은 자의 지시를 받는 죽은 자의 유령이라. 그래서 어쩌면, 이 유령작가의 운명은 거의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전임 유령작가를 대신하여,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결심하던 때부터 이 유령작가의 마지막 운명은 아마도 거의 정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렇게 사람 쉽게 믿고, 쉽게 말하는 유령작가라면 말이다. (아니, 그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진실을 밝혔는데, 입다물고 도망가지 않고, 그 쪽지질은 뭐람. 아무리 정치를 모른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유령작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거의 히치콕식 맥거핀을 쫓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히치콕식 스릴러에 비교하는 리뷰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자동차 추격씬이나, 주인공의 성격과 같은 몇몇 부분들을 짚어야 하겠지만, 이 맥거핀들의 활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범인찾기와 같은 것들. 전임작가를 죽인 것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답이 나와있는 쉬운 질문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담 랭은 범인이 아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그를 죽일만한 개연성이 높은 인물은, 거의 대부분 답이 아니다. 뭐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그리고 거의 늘상 그렇듯이, 그 단서는 매우 가까운 것에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그것에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의 성패는 그 마지막 진실이 얼마나 무게 있는 펀치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영국이 거의 미국의 2중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뉴스거리인가. 전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의 얼굴을 한 개가 부시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은 이미 더 이상 조롱거리도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보다 약간 반 걸음 정도 더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렇게 묵직한 펀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는 이미 있다. 유령작가가 구글링을 통해 몇몇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는 장면들. 구글링만 해도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펀치? 그리고, 솔직히 나는 약간 실소가 나왔다. 고용된지 며칠되지도 않은 유령작가는 구글링을 통해 중요한 단서들을 잘도 찾아내는 데, 그의 오래된 정적(政敵)들은 도대체 그 오랜 시간, 무얼하고 있던걸까.
 
아마도 이 영화의 의미는 그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튼 그 모든 진실이 결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는 사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알아볼 수 있는 유령작가는 결코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거의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령 작가라는 의미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유령 작가는 뒤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령 작가가 전면에 나서려고 한다면, 그 유령 작가의 운명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진짜 유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가장 큰 맥거핀은 이 영화의 제목일 것이다. 과연 진정한 유령 작가는 누구인가? 아담 랭의 뒤에서 그의 삶을 써내려가던 거대한 유령 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를 히치콕식 정치 스릴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아마도 영국식 블랙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에 의해 반복되는 몇몇 말장난들도 그렇고, 몇몇 정치적인 유머들도 그렇다. 예를 들어,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연상시키는 배우를 미국 국무장관 역에 배치시키는 것이나, 국제사법재판소를 따르지 않는 몇몇 나라들이란 오로지 미국과 그 적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이는 로만 폴란스키의 미국에 대한 영화적인 소심한 항변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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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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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이창동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늘 그렇듯이 영화관에 앉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약간은 놀라운 것은, 일단 앉고 나면, 이창동의 영화는 늘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비한 체험을 이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그 무아지경은 사라지고, 다시 모든 것들을 무섭게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시작해서, 모든 DVD를 가지고 있지만, 그 DVD들에 손이 가는 적은 거의 없다. 이창동의 DVD를 집어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최소 며칠간 머리를 헤집어 놓을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 노는 아이들 옆으로 무심하게 강물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강물에 한 소녀의 시체가 조용히 밀려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평온한 세상, 그 평온한 세상에 밀려오는 무거운 질문들. 이 시작은 마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을 연상시킨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황금들녘. 아이들이 뛰노는 그 한가운데에서, 박형사(송강호)는 찌푸린 얼굴로 배수로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다시 어떤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약간은 놀랍게도, 이 영화 <시>의 마지막 역시, 조금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박형사는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혹자의 말처럼 범인은 지금 어디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일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던지는 어떤 경고의 메시지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소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소녀를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소녀가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질문이 무엇인가.

이 영화는 이창동의 전작들과 약간은 맥이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오아시스>나 <밀양>같은 것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오아시스>에서는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밀양>에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다시 <시>에서는 가해자와 연루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연루되었다는 것.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지만, 가해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 글쎄. 이창동은 이를 단순히 주인공 미자(윤정희)로 한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좀 더 말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거의 공범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는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이며, 그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이다. 이 시라는 것의 의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 영화의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을 이야기한다. 즉 시의 도덕과 시의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 예를 들어 그 진동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미자가 거의 무의미한 아름다움을 늘어놓은 다음, 뒤돌아 나오다가 아프게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시의 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 그리고 도덕이라는 속성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시가 곧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곧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들은, 이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시는 존재하고 있다고, 그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먼저 하나. 이 말들은 약간은 신기하게도, 도덕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위의 김용탁 시인의 말들에서 '시'라는 말을 '도덕' 혹은 '양심'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보라. 거의 의미가 그대로 통한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도덕은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약자를 배려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여학생을 성폭행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끄집어내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수업의 어떤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영화 속 미자가 듣는 김용탁 시인의 시 강의 형태를 보면서이다. 처음에 나는 약간 웃었다. 참 시 강의라는 게 거저 먹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저 강의라는 것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사과를 들고 잘 보라고 한다음, 수강생 한 명씩 불러내어 '가장 아름다웠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면 되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 다음, 조금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시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 기법이나, 운율을 맞추는 법 등등에 대해서는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것으로 쓸 수 있는 것인가. 시가 그것으로 가능한 것인가. 글쎄.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도리어, 어떤 배움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천재성의 문제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학과 조금 비슷한 성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수학의 천재성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발현되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간다. 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젊은 시절에 빛을 발하고 요절한 수많은 시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소설과의 차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설은 시와 달리, 나이가 들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시와 달리, 소설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옛날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이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부분에서 상당히 내 흥미를 끌었던 주제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을 내린다.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신의 시여(施與)에 의해서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꽤나 복잡한 문제라, 이야기를 하려면, 비트겐슈타인까지 끌고 들어와야 하며, 잘 얘기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덕을 (시와 마찬가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는 어떤 의문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발휘하는가, 혹은 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전혀 그것을 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튼 이 논의 속에는 '일러주는 것'과 '보도록 하는 것'을 구분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이창동의 <시>의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보는 것'으로 가능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덕은, 혹은 양심은 도대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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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써서? 영화 속 시 동호회의 일원인 박 형사는 미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미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운다. 이 질문은 마치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도덕 때문에 우세요? 도덕을 지킬 수 없어서? 도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은 울어야 한다. 그것이 이창동의 하나의 태도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시인은 술자리에서 한탄하듯 내뱉는다. 시는 죽었어. 그래도 싸. 그것 역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도덕은 죽었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시는 정말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덕도 거의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도덕이란, 이창동이 말하듯이,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여학생을 성폭행해서는 안된다, 는 식의 어떠한 것, 즉 규범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몇 개의 힌트가 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속들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 미자가 찾아간 병원의 텔레비전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둔감하다. 그리고 이 둔감함은 병원 밖으로 나오며 그대로 이어진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이를 어떤 하나의 구경거리로 바라볼 뿐이다. 이 장면에 조금은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미자 뿐이다. 미자는 심지어 손자에게 그 소녀에 대해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자도 겨우 그 정도 뿐이다. 그 정도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미자는 시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여전히 미자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있기를 계속 갈망한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 미자는 시를 써내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클래스의 다른 사람들은 같이 시 수업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시를 써내지 못했다. 그 차이.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미자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손자의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기범 아버지(안내상)는 조소하며 되물을 뿐이다. "시를 왜 배워요?"

시를 쓰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그 반대가 더욱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도덕적인 인간이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이해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시가 왜 좋은지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창동은 거의 용감하게, 무모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덕적인 인간만이, 시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일단 '잘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잘 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대로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도 보고, 먹어도 보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이창동은 말한다. '어떤' 도덕이 유지되는 것(혹은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의 하나의 모습은 시라고 말이다. 가장 도덕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창동의 이 영화 <시>가 거의 중세의 도덕극을 연상시킨다고 말하였으나, 이쯤되면 거의 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어떤 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 즉 완성된 미(美)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 충일한 것, 그들은 그제서야 그것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의 덕(arete)은 이창동의 '덕'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거의 숨을 쉴 수 없게 한다. 미자의 목소리는 어느틈에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때 소녀는 관객에게 거의 정면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놀라운 체험. 그렇게 영화 속 관객들은 미자가 가해자와 연루된 것과 같이, 다시 미자에게 연루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현대사회에서 공범이 된다. 세상 모든 약자들에 가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말이다. 소녀는 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 나는 노트에 반복하여 쓴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언젠가는 노력을 해봐야겠지요. 명사를 잃고, 그 다음에 동사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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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 The housemai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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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임상수가 만든 이 서늘한 그림에는 출구가 없다. 마치 이 마지막은 복수가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을 복수로 본다면 말이다. 임상수는 설명을 시도한다(<씨네 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은이(전도연)의 마지막 시도는 나미를 괴물로 만드려는 시도였다고 말이다. 그리고 임상수는 싸늘하게 덧붙인다. 이를 봄으로써, 아마 나미는 후에 괴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이런 친절한 설명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면 좀 좋으련만.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 냉소하는 임상수의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말을 그대로 믿기도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아니, 임상수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나미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무슨 복수가 된다는 말인가.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 괴물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훈이(이정재)와 해라(서우)는 나미가 괴물이 되는 편이 더 좋을는지도 모른다. 훈이와 해라는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괴물인 편이, 이 세상에서 더 살아남기가 쉽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미는 알아서 괴물이 되줄 터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자각하고, 자기를 위치에 맞게(혹은 그 위치에서 살아남도록)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던 이 아이가 괴물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어쩌면 은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이가 마지막 선택을 행함으로써, 나미가 괴물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은이가 행한 복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지만, 그것은 복수였을까. 

은이가 행하는 이 방식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은이는 말한다. 찍 소리라도 내보고 싶다고 말이다. 군부독재 시절,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찍 소리를 내보려고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인해 이 정권들이 어떤 반성에 이르렀는가라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죽음들이 의미없는 죽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혹은 그것을 바보같은 시도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아무튼 간에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의미있는 어떤 시도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시도의 한 가지 부분은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독재정권의 신민으로 살지 않겠다는,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바보같은 인간으로 남지 않겠다는, 혹은 기계부품과 같이 취급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그런 선언.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그런 선언. 그래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신문에 한줄짜리 기사로라도 취급되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그었다.

아니, 나는 은이가 노동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그런 마지막을 택했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임상수가 파놓은 이 출구없는 마지막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와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중이다. 여러 리뷰들에서 지적하였듯이 임상수의 오프닝 씬은 인상적이다. 떨어지는 여자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시선들. 그들의 무표정한 시선들에는 이유가 있다. 일을 해야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 여자가 비워놓은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갈테니 말이다. 그리고 은이는 유아교육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곧 대저택의 하녀로 채용되고, 다시 그 자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보면, 그 자리 역시 다시 누군가가 채우고 있다. 마지막에 주목해봐야 할 것은 아이의 시선이나, 훈이나 해라의 우스꽝스럽고도, 그로테스크한 행동들이 아니라, 은이와 병식(윤여정)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또다른 하녀들이다. 그 하녀들의 그 무표정한 시선들. 그리고 임상수는 훈이의 입을 빌어, 해라마저도 거의 하녀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한다. 훈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이나 병식은 집안일을 해주는 하녀이고, 해라는 아이를 낳아주는 하녀이다. 훈이는 선심쓰듯 말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애를 낳게 해줄께. 그리고 해라와 해라의 어머니(박지영)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참이다. 애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낳아야 한다고 되뇌면서.




이 타의로 빚어진 하녀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래서 어떤 하녀가 곧 다른 하녀로 대체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은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저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하녀로 남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 말이다. 그 선언과 조금은 비슷하지만, 또 무엇인가 달라보이는 것에 하녀 병식의 행동들이 있다. 경멸하는 것. 겉으로는 정중하게 행동하지만, 돌아서서 경멸하고 욕하는 것. 이른바 '아더메치'. 그리고 이 방법으로 병식은 아마도 그 긴 세월의 모욕을 버텨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마도 이 방법은 이 세상에서 은이처럼 선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텨내는 방식일 것이다. 경멸하는 것. 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 

그리고 이 경멸은 왠지 최근의 어떤 사건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한 대학에서 여학생이 나이든 청소부를 모욕했고, 네티즌들은 그녀에게 경멸을 퍼붓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며, 급기야는 그녀의 '신상을 털었다'. 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거기에 스며있는 계급성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이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것에 담겨 있는 계급의 문제가 한 몫을 했다. 예를 들어 만약 이것이 나이 어린 청소부와 나이 든 청소부 사이의 문제였다면, 이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경멸은 또 한편으로 보면 위험한 부분이 있다. 경멸은 그 자체에 일종의 계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녀 병식의 경우. 병식은 영화 초반부에 훈과 해라를 노골적으로 경멸하지만, 동시에 은이도 경멸한다. 즉 병식은 훈과 해라보다는 자신이 낮은 위치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동시에 은이보다는 자신이 높은 위치라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것의 위험, 즉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인간을 경멸한다는 것에 내재된 무언가의 위험성.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여학생에 대한 경멸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도덕이라는 것의 형태로 포장되지만, 그것이 어쩌면 현대 사회의 어떤 부분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때로는 그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이 무서워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멸을 경멸하는 나도 무서워진다.

아무튼 임상수가 그려낸 출구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우리는 은이처럼 할 수 없어서, 그저 경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임상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한도 내에서 고결한 삶을 산다.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생겼을 때조차 죽음으로써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고자 한다. <하녀>는 고결함에 관한 영화다."(<씨네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중) (그래서 어쩌면 임상수는 은이를 거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니 어린아이도 아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캐릭터로 그려냈는지도 모르겠다. 해라의 어머니가 전도연을 떨어뜨릴 때, 쟤들은 당연히 저러겠지, 왜 은이는 일부러 저러는 것도 모를까라고 생각한 나는, 이미 고결해지긴 틀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은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결함을 지키거나, 병식처럼 경멸하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저  출구없는 그림의 서늘함이 선뜩하게 느껴질 뿐이다.




덧. 이 영화는 나름 괜찮지만, 괜히 서스펜스니, 에로틱 스릴러니 하는 말을 갖다붙여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영화는 원작 <하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괜히 리메이크 어쩌구 해서는 또 불필요한 욕을 먹고 있다. 이건 그냥 임상수의 새로운 <하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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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0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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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7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