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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나무 아래 ㅣ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평점 :
1902년 생 한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은 2014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한 재미를 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익히 영화,드라마를 통해 수없이 리메이크 되었으며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나이불문하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요코미조 세이시. 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었던 그는 종전 이후 글을 쓰면서 삶의 재미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품 곳곳에서 전쟁은 그 배경이 되고 있고 때로는 인물의 상황설명이 되기도 하면서 종종 등장한다.
[백일홍 나무 아래]는 장편이 아니다. 추리 소설의 거장이 써온 네 편의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져 있다. "살인귀"," 흑난초 아가씨"."향수 동반자살"," 백일홍 나무 아래"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이 네편은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해서 마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 혹은 한 소설 속에 나란히 등장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느껴진다.
귀신들이 난무하고 음양사들이 속출해 음울하게 상상되어지던 헤이안 시대와 마찬가지로 종전 후 일본은 스산하게 느껴진다. 삶과 인격이 파괴된 전쟁 속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건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소설 속 배경인 셈이다. 서른 살 즈음의 긴다이치 코스케가 밝혀내는 4건의 사건들은 짦으면서도 아주 강렬했다.
1947년이 배경인 <흑난초 아가씨>는 에비스야 백화점의 딸의 도벽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사건이다. 3층 신입 주임 게이키치가 베일을 쓴 여자에게 살해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 주임이었던 미야타케 긴지의 시신이 백화점 내에서 발견된다. 이는 모두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여인이 흑난초 아가씨로 변장해서 발생한 사건으로 종결지어졌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살인귀]의 경우엔 서로의 배우자를 배신하고 부부로 살고 있는 뱃속이 시커먼 가가와와 가나코. 자신들을 찾아온 배우자들을 모의하여 살해한 뒤 가가와 역시 죽인 가나코는 결국 법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천하의 악인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그로 인해 연관된 사람들의 삶도 파도 앞의 공기처럼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씁쓸한 이야기였다.
세번째 이야기인 [향수동반자살]은 익숙한 구조의 이야기이긴 했다. [이누가미 일족]이나 [ 삼수탑],[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처럼 한 집안에 얽힌 이야기로 할머니 수장이 있는 부호가문에서 일족 중 누군가가 살해되는 사건이 먼저 발생한다. 긴다이치를 통해 사건을 의뢰했던 마쓰요 앞에 밝혀진 진실은 잔인했다. 믿었던 손자의 배신과 그간 억울했을 손자에 대한 애잔함, 방탕한 남자의 행실로 인해 상처받았을 여인들의 마음, 그리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편지로 남기며 여인을 따라 자결한 또 다른 남자. 사랑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좌지우지 하는 것인지......!
가장 기대했던 [백일홍 나무 아래]는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여인들 앞에 서면 굳어지는 자신의 결혼을 위해 9살 고아소녀를 일부러 데려다 자신에게 맞는 여인으로 키워온 약간 이상한 남자 사에키. 15살의 나이차이보다 15세 소녀가 첫 월경을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욕망을 채운 남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키운 아내를 탐하던 네 남자에게 그녀를 맡기고 전쟁에 참여했던 그가 귀환한지 일주일만에 자살한 유미. 아내를 살해한 남자를 독살하기 위해 1년째 기일에 네 남자를 모아 복수를 감행한 남자의 비밀 뒤에 또 다른 남자의 비밀과 복수극이 존재했으니....세월이 흐르고 흘러 밝혀져봤자 이는 아무 소용 없어라.
희망이 사라진 시대.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런 인물들을 눈으로 찍어내는 사진사같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배신과 오해가 난무하던 끝에 그 진상을 밝혀낸 더먹머리 탐정의 마음엔 무엇이 남았던 것일까. 담담하게 사건을 풀어내기만 하는 그 탐정의 심리상태가 참으로 궁금해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