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사람의 창자를 이리저리 찌르려고 공부하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사람 몸을 여기저기 가위질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싶다며 외과의사가 된 남자.

배신당할까 봐 두려워 먼저 배신하고 그녀의 인생에서 도망쳤다가 정확하게 37년만에
예순 여섯의 나이에 병들어 찾아온 예순 아홉의 그녀를 돌보게 된 남자.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에 사는 그녀의 딸을 처음 만난 날 "네 아버지야"라고 소개된,,,
평생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다가 인생의 어느 날 중년의 딸이 생겨버린 남자.

이 모든 경우의 수에 속하는 남자가 동일인물 .... 단 한 남자다. 범죄소설이겠거니하고 읽기 시작한 <이탈리아 구두>는 이렇게 엉뚱한 관계속에서 시작된다.

 

독특하게도 그들 모두는 특이한 인생을 선택했다. 홀로 섬에서 사는 삶을 택한 남자나 미혼모로 딸을 낳은 후,  평생 애증의 관계로 지내고 있던 여자, 부모와 동떨어져 숲에서 살면서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택한 이웃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히피처럼, 집시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딸. 평범한 인물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소설 속에서 묘하게 위로받게 되었다면 나는 이상한 독자일까.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수다스럽지도 않았으며 과거의 망령에 어느 정도는 잠식당한 채 살아간다. 늦은 화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세련된 화해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투박성이, 모자람이, 완벽하지 않음이 도리어 날 것 상태의 인생처럼 느껴져 낯설지 않았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도 있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민폐를 끼치며 살기도 하고, 사과의 타이밍을 놓쳐 '에라이 모르겠다'는 식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건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봄직한 일들이 아닐까. 크든 작든간에.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고 책임져야하는 순간도 있다.

37년 전 남자가 저지른 도망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여인은 그를 원망하기 위해 수소문해서 찾아왔다기 보다는 딸의 존재를 알려주고 그의 곁에서 오랫동안 마음에 묵혀 왔을 체증같은 미움을 스스로 내려 버리려고 온 듯 했다. 그런데 남자가 잘못을 저지른 건 '사랑'앞에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2년 전, 외과의사 시절 촉망받던  수영선수 앙네스 클라르스트룀의 팔을 잘라 버렸다. 고작 스무살이었던 그녀의 반대쪽 팔을. 수련의가 잘못된 팔을 씻고 수술 준비를 한 오류를 눈치채지 못했던 그는 수술 한 달 뒤, 사회복지부로부터 고발당했다. 어깨 통증이 있던 팔도 재진찰 결과 절단할 필요가 없다는 소견이 나오면서 더이상 수술대에 설 수 없었다.

 

 37년 전에도 도망쳤던 그는 마찬가지로 12년 전 수술과실에서도 도망쳐 섬으로 들어왔다. 이후 조용히 홀로 살고 있던 그에게 하리에트가 찾아오면서 앙네스와도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일까. 많이 늦긴 했지만.

 

묘하게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고난 상태와 비슷했다. 이상하게도 위로받는 느낌. 희안하게도 치유된 느낌. 그런 분위기가 솔솔 풍겨온다. 민트색 표지의 북유럽 작가 소설에서. 이전에 그가 썼던  소설들과는 사뭇 달랐던 <이탈리아 구두>는 서툴고 비겁했던 어른이 등장하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전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