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의 소개팅과 다섯 번의 퇴사
규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얼마전 한 작가의 인터뷰를 보다가 "연애,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게 질리도록 사랑받아 본 경험과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시간이 지나고나면 연애라는 것이 시들~해 지는 것이 아니라 평온해지는 단계가 찾아오는 것 같다. 그냥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의 연애온도는 언제나 36.5도. 그래서 온기는 느껴지지만 화상을 입을 염려는 없다.

 

아직 그 시기가 지나가지 않았거나 대상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 연애에 대한 환상은 짙어지기 마련인가보다. 나이불문, 성별구별없이. 동거한지 한 달차 동성친구인 구월과 우영은 <한번 더 해피엔딩>의 그녀들처럼 사랑 앞에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다.

 

 

p19  때가 됐다

 

 

키차이가 30센티미터나 나서 그 품에 쏙 들어가는 맛에 함께 잠드는 게 좋다는 우영은 목하 연애 중. 하지만 남친 '단오'는 줄줄이 동생들 학비 대느라 청혼할 수 없는 상태이며 여자에게 치명적이라는 이유로 동거도 거절한 남자. 이쯤 되면 성실하고 개념 있는 남자와 연애중인 듯 하지만 소설 속에서 우영의 파트는 '연애'가 아닌 '퇴사'쪽이었다. 디자이너로 근무중이지만 "조만간 퇴사할거야"를 외친 그녀의 목표는 소설쓰기. 인간답게 살고 싶어 뛰쳐나온 첫번째 직장, 뒷돈 빼돌리는 부장님을 피해나온 두번 째 회사, 왕따로 지내다 세번째 퇴직을, 군대같았던 다섯번째 출판사에서는 우울증을 앓다가 나왔고 이전의 실수들을 만회하며 무난하게 다니고 있는 현재의 회사에서는 이제 그만 때가 되었으니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여섯번째 퇴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2말3초(20대후반 30대초반)의 직장여성들이 흔히 겪는 나이테 같은 통과의례의 시기가 바로 요맘때가 아닐까. 나도 그랬다.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와서 남들보다는 한 발 빠른 승진과 넉넉한 통장을 째고 뛰쳐나가고 싶어했던 때였으니까. 이 맘 100퍼센트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말릴 사람이 절반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우영은 참 복터졌다. 차분히 들어주는 친구와 "글 쓰려는 사람이 그 정도의 예민함과 일탈에 대한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한 것"(p123)이라고 응원해주는 엄마도 있고, "신은 회사에 다니라고 인간을 만든 것 같지는 않아"(p59)라고 여섯 번째 퇴사를 인정해주는 오빠가 가족으로 뭉쳐 있으니까. 물론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일은 사라졌지만.

 

사실 대부분의 지인들은 '시집가라'고 말하거나 '그냥 다녀라'며 현실적인 충고를 읊기 마련이다. 소설 속 우영에겐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도. 물론 대박치는 내일은 없다. 결혼은 멀었고 잠정적 백수 상태에 돌입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절망하지도 희망하지도 않는다. 참 차분하다. 그래서 이 소설 담담하게 읽혀졌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불사하는 드라마의 그녀들을 바라보던 것과 달리.

 

물론 '소개팅' 파트를 맡은 구월의 경우는 글로 늘어놓자면 속답답해 할만한 사건들이 있긴 했다.

 

 

p22  세계 어딜 가든 걱정은 스토커처럼 쫓아다녀

 

 

일찍 결혼하고 싶어 착실하게 소개팅을 했지만 참 안생긴다. 그녀의 남편.

165센티미터에 비율이 좋은 구월이건만 단점이 하나도 없는 대신 장점도 매력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드라마 속 구동미 캐릭터처럼 남자가 포스티 잇처럼 붙었다하면 이내 떨어지고 만다. 단지 매력탓일까. 예식장까지 잡았다가 신랑의 잠적으로 결혼식이 파토나는 것은 기본이요,  한 두 달 사귀다가 헤어진 그 남자들은 꼭 몇 달 안가서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리곤 했다니...약오를만도 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또 다음 소개팅남을 만나러 나가는 구월. 최근엔 굥굥이라는 애완견까지 맡길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남자와 헤어지고도 다음 소개팅을 잡은 그녀를 보며 이별에도 내공이 쌓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인생이 그러한 것처럼.

한보따리 이고 앉아 가슴 답답하게 만든 걱정거리도 당장 내일 터질 일이 아니요, 로맨스 소설 같은 핑크빛 로맨스가 똑똑 두드리면서 이른 새벽 문 앞에서 대기타고 있지도 않는 우리네 현실처럼 동거하고 있는 두 여자들의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나이에 걸맞에 평범했다. 그리고 필체는 참 평온했다.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행본을 평탄하게 읽어나가는 것 같은 속도로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읽어냈다. 예쁜 소설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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