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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기분
박연희 지음, 쇼비 그림 / 다람 / 2016년 1월
평점 :
이상하게도 그랬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2016년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방송작가의 책을 참 많이 읽게 되었다. 표지와 제목이 참 예쁘다
싶어 고른 <명왕성 기분>이라는 책도 읽기 전 저자 약력을 읽어보니 방송작가의 책이었다. <우리말 나들이>??? 그래, 이
익숙한 프로그램을 쓴 작가는 현재 영국 경찰의 아내가 되어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책은 명왕성같은 영국라이프에 관한
이야기일까?
p5
살짝 손잡았던 두근거림보다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슬픔보다
혼자라는 쓸쓸함과 외로움보다
라는 첫장의 문장. 모태솔로가 아닌 다음에야 이 문장으로 인해 시린 가슴을 쓸어내릴 이도 있을 테고, 지나간 추억을 아련히 떠올려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의 경우는 혼자여서 쓸쓸했던 시간보다는 함께인데도 불구하고 외로웠던 시간에 대한 추억이 있다.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데도 왜
외롭고 쓸쓸한 것일까? 남들도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일까? 궁금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국제 전화 너머로 친구는 대답했었다. 다
그래. 인간이라서 그래. 원래 그런거야. 라고.
남자 사람 친구인 15년 지기 친구에게 늦은 밤 전화를 걸면 나는 용건만 짧게 이야기 하곤 했다. "야, 괜찮다...라고 좀 말해줘바바"
그러면 9시에 잠들어 한참 꿈 속을 헤매던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괜찮아. 다 괜찮다" 딱 한 마디만 했다. 그리고 통화를 종료했지만 나는
달콤한 위로를 얻었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서 참 편했다. 그 친구가 1년에 한 두번쯤 "나중에 이야기 해 줄께. 그런데 나 기분이
참..."까지만 말해도 "잊어버려. 다 잘될거야"라고 말해주곤 끊었다. 서로 구구절절하게 묻지 않아 좋았고 다음에 만나면 다 해결된 상태로
웃으며 다른 이야기 할 거리들이 많아 좋았던 친구가 있었다. 20대에서 30대에 걸친 시간동안-.
그래서 내 기분은 안드로메다행이 되진 않았나보다. 내 주변에 좋은 친구들 덕분에. 괜찮다고 말해줄 목소리가 있어서.
시처럼 짧고 에세이형식으로 편하게 쓰여진 글들은 '헤갈-하다'나 '맛-바르다','발맘-발맘"같은 낯선 우리말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읽으면서는 지나쳤던 그 말들은 이야기 끝의 각주를 보며 다시 페이지를 펼쳐 찾아보게 되는... 마치 '뒤늦은 보물찾기'하듯 읽게 만들곤 했다.
그냥 그 단어들만 좀 더 진하게 표시되어주었으면 편했을텐데-.
하지만 이 책은 우리말 교본이 아닌 더께더께한 누군가의 일상의 이야기들을 내 이야기와 접붙이는 에세이다. 명왕성 기분이 들때 외롭지 않도록
마음의 무기가 되어 줄 착한 사마리안 같은 이야기 책.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그 옛날의 친구처럼 위안을 안겨주는 책의 제일 끝엔 예쁜 우리말 표현
43가지가 나열되어져 있다. 모두 책에 등장했던 표현들로 '시나브로'와 '더금더금'처럼 원래 아는 말들도 있었지만 ' 곰비임비','어우렁
더우렁'처럼 생전 처음 듣는 표현들도 있었다.
15세에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가 그 먼 타지인 영국에서 그것도 임신 8개월째 시킨 피자와 함께 먹으려고
딴 콜라에 적힌 'dad'라는 단어를 보고 뭉클했을 그녀. 술취한 사람과의 시비에 휘말려서도 끝끝내 정의감을 포기하지 않는 남편을 보고 심장이
뚝 떨어졌을 그녀, 그 옛날 남자를 좋아했던 남자를 계속 사랑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며 살짝 아쉬움을 드러냈던 그녀는 모두 한 사람이다. 가끔
<우리말 나들이>를 보면서 작가는 정말 바른말만 할까? 잘 알아서 맡은 프로그램일까? 맡았기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게
만들었던 저자는 의외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선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일상의 걱정거리들도 평범했다.
대신 그녀의 글은 아주 편안했다. 어렵지 않았으며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종이 위 까만 글자에 무슨 온도가 있냐고들 묻지만
나는 그 글자들의 온도변화를 책을 읽으며 겪을 때가 많다. 2008년 mbc 대한민국 아나운서 대상 작가상을 수상했던 저자는 가끔 명왕성 기분을
타고 있을지 모르나 우리말처럼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