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배우 전지현이 출연했던 <설화와 비밀의 부채>속 두 소녀의 우정은 시간이 갈수록 묵혀진다. 물론 오해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고 서로의 삶이 달라진 부분들도 등장하지만 시대는 달라도 우리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기에 두 소녀의 우정이 여인의 우정으로 변모해가는 것 역시 물흐르듯 지켜봐진다. 그 마음 그대로 읽히는 또 다른 소설 한 권이 이도우 작가의 <잠옷을 입으렴>이었다.

 

구성작가, 카피라이터 등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후 이종사촌간인 수안과 둘녕의 이야기를 담은 <잠옷을 입으렴>을 내어놓았는데 전작을 잃지는 못했지만 현재의 둘녕과 과거의 둘녕을 오가며 뱉어내는 추억들이 진한 진국맛이 나 전작 역시 훌륭하리라 짐작케 만든다.

 

첫문장은 꿈속 이야기로 시작된다. #7 꿈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슬픈 꿈이었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그 아이와 타박타박 걷던 시절, 등에 멘 책가방에서 필통 속의 연필들과 빈 도시락 수저가 달그락거리던 날들의 이야기였다 라고. 분명 눈으로 읽고 있는데 내 귓가에는 그 달그락거리는 수저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조용히 울었다에서 예상 할 수 있듯 아주 그립지만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누군가 혹은 그 시절의 이야기구나 싶어진다. 꿈처럼 시작된 둘녕의 추억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데 늦은 밤 조용히 몇몇이 없는 영화관에 앉아 무묵히 화면을 응시하듯 구경하게 만드는 소설은 그렇게 내 마음을 조금씩 적셔 나갔다.

 

기억속에 두고 온 사람. 둘녕에게는 이종사촌 수안이 그랬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재혼한 아빠에게서도 멀어져 외가에 와서 더부살이하게 된 둘녕에게 수안은 처음부터 살갑게 굴지는 않았다. 그랬던 둘의 사이가 쫀쫀해진 것은 장에서 둘녕의 손을 놓았던 수안의 마음속에 미안함과 함께라는 의식이 불어넣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으리라. 그렇게 고둘녕과 정수안은 둘도 없는 자매이자 친구가 되어 학창시절을 함께 해 나갔지만 둘녕은 외가에서 함께 살되 가족일 수는 없었다. 잊을만 하면 툭툭 붉어지던 "넌 가족이 아니야"라는 표식. 이모부의 외도, 막내이모의 가출, 대학을 그만두고 내려와 버린 외삼촌의 지난 역사를 함께 겪었지만 물과 기름이 한 컵에 담긴듯한 이질감은 그녀를 더 쓸쓸하고 외롭고 눈치 보게 만들었으리라. 더부살이. 그래서였을까. 대학을 보내주겠다는 외가쪽 어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녀는 손재주를 살려 알바 및 취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글을 써오던 수안이 사라졌다. 그녀의 인생에서.

 

 

P127  근사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학교에 다녀서는 안되는 거라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걸 배운다면 다들 똑같아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혼자만의 독특하고 멋진 이야기를 지어내려면 엘리너 파전처럼 학교 따위는 가지 않고,

        먼지 가득한 다락방에서 종일 뒹굴며 놀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시절 소녀들의 감성은 물오른 꽃망울 같았다. 현재의 둘녕은 편지를 쓴다. 삼촌에게, 아빠에게, 외할머니에게, 이종사촌 웅이에게, 삼촌과 결혼한 숙모의 동생인 산호씨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들을 썼다. 어쩌면 고백일지도 모를 그 말들을 가슴으로 부치기 위해. 그녀는 마지막에 또 다른 고백을 덧붙이고 있다. 한때 내 것이었다가 나를 떠난 것도 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었노라고. 그녀에게 인생은 셋 중 어느 것에 속해 있는 것일까.

 

떠났다기 보다는 본디 둘이 하나였던 것 같았던 수안과 둘녕은 어쩌면 한 몸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추억들을 끌어안고서. 어린 딸을 두고 집을 나가버린 엄마를 둔 둘녕과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는 엄마의 딸인 수안. 성격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그 길도 달랐던 그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엄마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P343   엄마란 여자는 세 종류야. 낳고 키우거나, 낳고 버리거나, 낳고 키우다가 버리거나

 

그 중에서 드물게 예외인 엄마는 낳고 버렸다가 다시 찾아 키우는 거 라고 말했던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사춘기 소녀들에겐 부모나 가족보다는 친구가 더 소중한 시절이긴 하지만 혼자인 소녀와 혼자가 편한 소녀의 우정은 너무나 절절했기 때문에. 자기 주장 강해 보이던 수안보다 조용조용하기만 했던 둘녕이 더 강한 쪽이었을까. 결국 끝까지 남아 생을 이어가는 것은 둘녕이었으니.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은 영원히 자라지 않은 채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말았다는 소설의 내용처럼 나의 기억 너머 어딘가에도 성장을 멈춰둔 채 남겨놓고 온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문득 그 기억을 떠올려보며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려 한다. 꿈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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