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올리는 순간에도 고양이 두 마리가 옷 속에 들어와 헤집고 다니고 있다. 꼬물이 시절에는 커다란 니트 주머니에 각각 넣어주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커버려서 이렇듯 니트 가디건 속에 들어 앉아 옷이야 늘어나든 말든 장난치고 놀고 있는 것이다. 집사를 인간 캣타워삼아.

 

 

그래도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은 고양이이기에 망정이지 마크 롤랜즈처럼 늑대를 키우는데 그 늑대가 이런 행동들을 했다면 나는 이미 병원에 입원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집은 집대로 남아나는 것 없이 말이다.

 

 

그래도 한번 생명에게 마음주면 쉽게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기에 철학자와 늑대의 11년간의 동거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대학을 일찍 마치고 또래들을 가르치게 된 젊은 교수 마크는 그 시기를 파티에 다니며 흥청망청 신나게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늑대 한 마리를 입양했는데, 이름이 “브레닌”이었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면서 반려동물이 된 브레닌은 채식주의자인 마크의 식성에 따라 생선은 먹고 육류나 유제품은 먹지 않는 페스카테리언으로 길들여져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 본성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술취한 이웃 남자가 담을 넘었을 때 개처럼 짖어서 위협을 주기보다는 목을 물고 늘어지는 쪽을 선택했고 토끼나 쥐를 사냥하기 위해 15분 넘게 대기하고 있으면서도 지루해하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구를 죄다 뜯어놓기도 해서 브레닌만 키울때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가야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한다. 철학 수업을 같이 듣는 늑대라.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면 상당히 흥미로웠으리라.

 

 

얼마전 [늑대소년]을 읽고나서인지 늑대라는 동물은 내게 기다림을 아는 정감있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철학자가 마지막순간까지 생을 함께 했던 늑대는 야생의 그것이 아니라 반려동물의 그것처럼 느껴졌고 안락사를 시킨 이후 그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던 심정도 100% 공감되어졌다.

 

늑대와 함께 한 삶을 소설처럼 풀어놓지는 않았지만, 철학을 논하며 그 관점에서 이해하라고 종용하지도 않지만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본 것처럼 감성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되어 그 함께 한 삶이 그려져있고 브레닌이 도덕적 행위자가 아니라 도덕적 수동자임을 이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사고를 일으켜도 브레닌은 골치덩이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라고 불렀던 가족애라고 불렀던 그 감정을 우리는 반려동물에게 이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가 그렇게 느꼈듯 말이다.

 

브레닌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 딸인 테스가 남겨지긴 했지만 브레닌 자체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마크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그리움을 전할 뿐이다. 늑대와 함께했던 특별한 시간을 그는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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