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입시교육의 주입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녀의 시간은 그래서 즐거운 시간이었고 새로운 발견의 시간이었으며 주요과목이 아니어서 자주 배울 수 없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지던 시간이었다. 그런 그녀로부터 생에 처음으로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새로운 해석본을 들을 수 있었는데 연산군보다 광해군이 더 인상적이었던 까닭은 그가 펼칠 실리외교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절하되어 있었으며 그를 폭군으로 몰아야지 자신들의 정당성을 펼칠 수 있다 생각했던 후의 정권주역들 때문이었다.
광해. 전쟁을 겪어내고 굴욕을 참아내고 자신이 가진 것을 120% 활용할 줄 알았던 사내. 그런 그에게서 강인한 내음이 나서 좋았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시대가 그토록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정조대왕 같은 위엄서린 왕이 될 수 있음직한 왕이었기에 광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언제 접해봐도 즐거운 읽을거리들이었다.
그런 광해를 두고 [철가면]에서나 일어났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얼굴이 똑같은 두 사내. 한 사람은 임금이고, 한 사람은 천한 광대였다. 기생집에서 양반네님들에게 야한 농지거리나 해서 입에 풀칠하던 그가 "왕자와 거지"의 뒤바꿈처럼 15일간의 신분상승의 어명을 받았다. 15일. 누군가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의 기회치고는 참 짧다. 하지만 적서차별조차 엄격했던 조선이었다. 그에게는 사탕같이 달콤했을 그 시간. 품어서는 안될 여인에 대한 연정도 품어보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소신발언도 일삼으며 "왕역할'이 아닌 진짜 왕이 되고 싶었으나 그는 너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으로 하여금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도 다치는 것도 싫어할만큼. 그런 그였기에 소중한 여인의 손수건에 묻혀진 혈흔이 되어 다시 궁에 돌아왔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15일간의 삶을.
광해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역사가 알려주지 못한 것을 살아있는 자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왕이었는가 궁금하기보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기는 처음이었다. 질투심이 강하고 조심성이 강하고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강인하게,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죽음보다는 삶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고 살았을 조선의 15대 왕은 또 한 명의 광해를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무한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가 펼쳐보고 싶었을 법한 세상을 아바타를 통해 세상에 내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원작소설 속에서 하선은 소설의 전반을 강인하게 이끌고 간다. 영화 속에서는 어떨까. 광해와 하선의 비중은 어떻게 나누어질까. 따뜻한 카리스마와 냉철한 카리스마의 배분이 어떻게 주어졌을까. 궁금해서라도 얼른 극장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