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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r 세계를 물들인 색 -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한 인간의 분투
안느 바리숑 지음, 채아인 옮김 / EJONG(이종문화사)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식감을 높이는 색이 있고, 식감을 낮추는 색이 있다. 어떤 그림을 보고 나면 유난히 배가 고파지게 만드는 그림도 있고 유독 피로감을 안겨주는 그림도 있다. 다 색감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미술을 강의하는 언니를 통해서 작년 즈음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가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마치 마술과도 같아서 들으면서 색에 대한 흥미로움이 새싹처럼 돋게 만들었는데, 그 이후 따로 미술을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했기에 호기심은 거기에서 딱 접혀버린 상태였다. [더 컬러- 세계를 물들인 색]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을 덮은 많은 색을 우리의 눈은 다 인식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눈뜨고 장님같이 살아가고 있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눈에 보이는 색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만 욕심내야 되겠다 싶다. 어린시절 12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가 24색, 36색, 48색, 126색...이렇게 점점 더 많은 색을 가지다보니 달랑 12개만으로 그릴때보다 그림은 더 풍성해지고 색을 겹쳐쓸 수 있어 미술시간은 언제나 마술시간처럼 기다려지는 수업시간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결국 전공은 하지 못한 채 다른 길로 들어섰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색감이 마음에 드는 물건은 갖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때도 알지는 못했다. 이런 색들에 예전부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는 것을......!
흰색 은 백악, 고령토, 조개나 알 껍데기 등에서 얻어지는 색으로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신성한 색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여신들의 몸에 걸치는 옷들도 다 흰색이었으며 이슬람, 가톨릭, 불교, 종교를 막론하고 신성시 여기는 색이어서 순례자의 옷까지도 흰색이었지만 수의나 상복에 사용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죽음을 함께 하는 색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뉴기니 이아트물족은 성인식을 치를때 흰색을 즐겨사용하는데 통과의례용이라고 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빨간색 은 성적으로 성숙된 색이라 동화 백설공주에서는 순수의 흰색에 빨간 피가 떨어지는 것의 의미도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어린 시절 무릎이 까지거나 팔꿈치가 까지면 할머니들이 의례 발라주곤했던 빨간 약의 레드는 보호를 전투의 색으로 쓰일때는 피를 상징하며 그로 인해 빨강은 위험과 죽음을 나타내는 색으로도 두루 사용되어왔다고 한다.
흰색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색은 빨간색말고도 검정색 이 있는데 식물탄, 그을음,유럽밤나무,진흙 등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색이었던 검정은 죽음,금욕,저승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힌두교의 최고신 비슈누가 아나율로 현신할땐 검은색으로 나타나 무섭게 인간들을 내려다보았고 진시황은 주왕조의 붉은 색을 걷고 자신의 검은색을 문장으로 삼았단다. 사실 블랙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유명한 디자이너인 샤넬을 대표하는 색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검정색이 상징하는 것은 심플하다는 의미 말고도 참 많았다는 것을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는만큼 이해하게 되나보다. 특히 관심도 없었던 코란의 검은 쿠픽체를 보면서 꼭 뱀이 구불거리는 것 같은 그 서체가 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져 얼른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아마 확인해보고 그 아룸다움에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앞의 색들과 달리 어렵게 얻어진 색들도 있다. 파란색, 보라색, 녹색은 희귀한 색들로 구하기 쉽지 않아 사용도 조금씩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물감이든, 크레파스든, 색연필이든 간에 풍족한 현대의 우리들에겐 다소 어려운 일이지만 셋 중 가장 없어서 못썼던 색인 녹색 은 녹토, 공작석, 녹청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색이었으며 성장, 부활, 풍요, 좋은 꿈의 상징이자 이슬람교의 상징의 긍정적인 의미가 많이 부여된 색이어서 그 희소성에 당대에는 많은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렀으리라 짐작이 된다. 작년 한 해 질리도록 보았던 얀 반에이크의 [아를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녹청이 치마 가득 사용되어서 희귀한 색인지 미처 몰랐으니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들도 참 많은 것 같다.
보라색 역시 얻기 힘든 색이긴 마찬가지였는데 자주색과 혼동되던 색으로 보여진 작품 중에선 이집트 콥트 교도의 미라를 감싼 태피스트리의 그림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듯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머가 섞여져 있는 듯 하여 보고 또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과거 파란색 을 만드는 일은 정교한 일이라 여성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는데 얻기 어려워 조금씩만 사용되거나 신성시한 까닭에 조심히 다루었던 색이었다. 하지만 양면적 의미도 부여되어 "공포의 색"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는데 게르만 족이 전투시 머리카락부터 말끝까지 스머프처럼 파랗게 물들인데다 그들의 눈동자색까지 푸른 눈이어서 적국의 전사들에게는 파란색은 곧 공포로 각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시아에서는 파란색에 마력,죽음,애도의 뜻을 부여하기도 했고 인도에서는 거부의 의미로 이 색이 사용되어왔다.
마지막으로 황토, 강황, 목서초에서 얻어지는 노란색 은 아시아에서는 행복과 신, 권력을 의미했고 불교나 폴리네시아의 부족사회에서는 성스러움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루벤스의 극찬을 받았던 나폴리 노랑과 달리 미라노랑이라 불리는 색은 아마천 붕대와 미라의 피부를 갈아만든 색이라고 하니 노란색을 마냥 순수하게 좋아할 수만을 없을 것 같았다. 특히 미라 노랑은 끔찍하게 여겨졌다.
사실 이 책에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색은 빠져있다. 단지 7가지 대표색에 대해서만 그 색이 어떻게 얻어져왔고 무엇이 원료가 되었으며 어떤 작품들 속에서 사용되어 왔는지 밝혀두고 있다. 하지만 이 7가지만 알고 있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그림을 감상할때나 일상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색을 대할때 어제와 달리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병실의 색은 어디를 둘러보나 흰색이다, 영화제의 카펫은 언제나 빨간색이며 수묵화는 먹으로 검게 그려진다. 쉽게 변하지 않을 이 색들이 대표하는 의미들을 잘 알게 된 지금, 색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참으로 재미난 스토리텔링을 가진 자연의 일부라 생각되어졌다.
살펴보면, 우리는 참 재미난 세상, 재미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그것에 감사하며 며칠동안 누워 읽은 책 한 권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