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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소녀가 죽었다. 태어난지 4년남짓 된 아이의 원죄는 무엇이었을까.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알리바이가 있건 없건 연류된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거나 가족과 연계된 사람들이어서 더 충격적인 소설 [백광]은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이다. [회귀천 정사]보다 더 진한 향을 풍기며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백광]은 얼마전 가슴 아프게 읽었던 한 소설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배겨의 아픔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것과 달리 지극히 가정사 내에서 파생되지만 결국엔 인간의 심리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샅샅히 훑게 만드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이 아이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야"라고 내뱉은 잔인한 전처의 고백.
전쟁터에서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소녀를 죽이고 만 과거를 떠안고 살아가는 치매 노인.
자신의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에 괴로워한 가정주부.
형부를 비롯해서 많은 남자들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여자.
아내의 여동생이 낳은 자신의 딸을 스스로 마당에 묻어야 했던 남자.
불륜녀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집에 잠입한 한 대학생.
이 모든 사실을 묵묵히 지켜보며 입을 다물어야했던 집.
죄악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소녀의 죽음으로 고통의 소리를 내지르게 되었던 것일까. 일곱명의 등장인물은 각각의 알리바이와 사연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뒤틀린 가정을 억지로 끼워맞추며 편안한 일상을 살아가는 척하고 있었지만 섬뜩한 반전은 그들 모두가 범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처럼 멋진 트릭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소녀의 죽음을 통해 산산히 부서진 이 가정의 어두움이 낱낱이 파헤쳐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 [백광]은 사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 같아 참 고통스럽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소설을 뒤로 하고, 범인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마당에 묻힌 4살 짜리의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있다. 소설 속이긴 하지만 죽어버린 4살짜리의 죄는 어른들이 만든 것인데, 아이가 희생되어서야 그 어른들의 죄가 밝혀지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인생인가 싶어져 쓴 커피를 연커푸 들이킨 듯한 우울함을 감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