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2011년 초, 첫 시작을 [살인자의 편지]로 시작했다. 살인이 추억의 대상이 되거나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그런 제목들이 붙여진 까닭은 아마 아이러니를 부각시켜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역시 그랬다. 손이 말굽으로 변하는 장애극복 소설이 아니라 한 인간의 폭력성을 비유적으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치로 손바닥을 뚫고 나오는 말굽이 사용된다.

바닥이나 디뎌야 할 말굽이 사람을 치고 생명을 앗는다. 그 자체로도 이미 폭력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기를 이미 포기한 사람들일지라도 폭력에 대한 응징이 폭력으로 되갚아진다는 계산 또한 또 다른 폭력이기에 ㅅ설은 기이한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된다.

[외등] 이후 줄곧 놓치지 않고 읽게 된 저자의 소설들은 선이 굵으면서도 감정을 저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 매력을 담고 있었다. 39년이나 작가로 살아온 그는 39번재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으며 25년한 선생노릇도 내려놓았고 막내 아들의 결혼으로 아버지 노릇까지 내려놓았으니 이제 작가노릇만 남았다며 겸손스런 서문을 덧붙였다.

살아있는 한 역할의 끝이 어디있겠느냐 만은 그만큼 더 원숙미를 갖추고 집중하며 작품을 써 냈다는 소심한 자랑이 아니었을까. 어느 해 헐리웃 노감독이 내뱉은 말처럼 우리는 아직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고백하고 있는 살인의 기록만 뒤적여 보아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허가 삶터에서 개장수 아비와 살아가던 "개백정의 아들"이 이사장 무리의 모함으로 여린의 집 방화범이 되고 옥살이를 하고 나올 동안 정적들은 그 땅에 샹그리라를 건축해 놓았다. 운악산의 샹그리라는 15년쯤 전에 지어진 집으로 원룸 14칸이 들어차 있었고 명안진종의 창시자가 된 이사장은 종교적 지도자의 탈을 쓰고 육욕을 채우기 급급한 인간이었으며 그 곁의 백주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단식원으로 알려진 명안진사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궁전이 되고 육림의 장이 되고 소리없는 폭력의 삶터로 변모되어 있었다. 화상으로 흉측해진 얼굴의 사내가 샹그리라로 돌아왔을 때, 그 안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린이 맹인 안마사가 되어 정적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인간의 추악함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여서 같은 붉은 피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소설 속에서 잔혹함을 대할때마다 심장 저 어딘가가 황폐해져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그들의 폭력과 몰락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게 만든다. 그들의 끝이 어디로 닿아 있는지 확인하게 만든다. 그래야만 시원해질 것만 같아서.

문학의 기능 중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도 있지만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처럼 적어도 이렇게는 살지 말아라는 교훈을 남겨 각성하게 만드는 작품도 있다. 그 기능이나 효능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읽어본 바에 의하면 소설은 그 쓸모가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다. 언제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