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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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편지]에 등장했던 작은 간이역은 KTX의 거대 역사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대형 할인마트보다 가끔은 동네 작은 점빵(?)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곳이 왠지 귀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도 활성역이 되어 있을지 궁금한 그 역만큼이나 작은 역이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별어곡은 정선행 산골역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지만 사람들의 역사와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그런 곳이 폐해져 간혹 그곳을 찾던 사람들은 물론 일터로 일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쫓겨났다. 하지만 오롯이 홀로 남아 추억을 지키는 그 별어곡의 사연을 "이별하는 골짜기"는 풀어내고 있다. 

역은 본디 머무는 사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보니 발걸음마다 줄줄이 흘려지는 사연들이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아 역에 저금하듯 차곡차곡 쌓여갔다. 

제초제를 먹은 아들 때문에 울고불고 하던 누군가의 모친의 이야기나 병들고 귀찮아져 역에 버려진 애완견들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은 물론 티켓을 파는 빨강머리 레지에서부터 제자식을 제 손으로 묻은 아비와 산기슭의 외딴집에 이사온 외지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사연이 몰려드는 곳이 역인 것이다.  스캔들과 가정사가 수다로 풀어지는 곳이 미용실이라면 역은 남녀노소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털어놓는 역사드라마 같은 역할을 오랜세월 톡톡히 해냈다. 

그 중 외지에서 이사온 두 여인의 사연은 나는 짐승이다.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고 닭이다 라는 과격한 문구와 함께 시작되는데, 의붓 아비에 의해 480원에 팔리고, 아이를 임신한 채 죽어갈수 밖에 없었던 정신대 여인들이 해방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듯 찾아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산기슭 외딴집에 이사온 두 여인의 정체는 몸과 마음 모두 멍이 든 채로 살아온 정신대 할머니들이었고 그들은 생의 마지막 의탁을 이곳에 맡기러왔다. 

반면 늙은 역무원 신태묵은 8살 피난 길에 가족을 잃어 외롭게 살아오다 자신의 과실로 남편을 잃은 여인과 그 딸을 거두며 살았다. 결국 그 사실이 밝혀져 아내는 자살하고 딸에겐 의절당한 채 살고 있어 이래저래 외로운 노인으로 늙어가는 곳, 별어곡이다. 늙은 역무원이 있다면 젊은 역무원도 있을 터. 스물 일곱의 막내 역무원 정동수는 역 맞은 편 제과점에 홀로 사는 여인 때문에 그 아비의 과거까지 밝혀지며 별어곡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역에 두고 떠남으로써 이야기와도 이별하는 역으로 남는다. 

역이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담긴 지구 한 조각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사연이 많이 담겼을 법한 사라진 작은 역들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구절절 사람냄새가 진하게 배여있는 이야기만큼 그리워지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별하는 골짜기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묻어놓은 이야기들의 무덤 같이 느껴지는 곳이라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이다. 

정말 있을까. 이 작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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