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차를 꺼내 마시고 밥솥에 밥을 안치고,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다가 미닫이 벽장 속으로 사라지는 여인. 
이 미스터리한 여인과 동거아닌 동거를 하고 있는 남자는 56세의 기상관측사인 시무라 고보다. 그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긴 하지만 소박하고 정직해뵈는 남자다.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집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되었는데, 그의 강박증은 범인을 잡기 위해 발동되고 냉장고 속 남겨진 음료의 길이를 자로 일일이 재고 노트에 기록해 나가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심증이 맞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증이 있으니 이젠 물증만 잡으면 될 일!!!

집은 여전히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고 있다            p.26

집은 조용하리만치 아무 것도 내뱉고 있지 않았으나 고보는 새로 설치한 웹캠을 통해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한 여인이 자신의 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화면 속 여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으로 되려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어 알려주려 하지만 여인은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모른 척 하며 오후의 한 때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오랜 실업자 생활로 인해 권리상실자가 되어 집도 수입도 없이 남의 집에 몰래 의탁하며 지내던 58세의 여성은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고 구류4개월만에 벌금 없는 5개월을 선고받고 한달만에 다시 자유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찾아 왔을 때 고보는 집을 팔고 떠나고 없었기에 그를 향한 편지를 쓰며 그 속에 자신의 사연을 담는 여인. 여인은 과거 이 집에 살던 가족이었던 것이다. 8세에서 16세까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담고 있던 집을 떠나게 된 계기는 부모님의 동반 교통사고 때문이었고 고아가 된 그녀가 집을 떠나 다시 되돌아왔을 때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고 가진 것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 예전의 집에 잠시 들어가고픈 욕구를 느낀 순간, 문을 잠그지 않고 출근하는 집주인의 실수로 인해 근 1년간의 동거아닌 동거가  시작되었다. 10월의 어느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고보의 집 외에도 집을 자주 비우는 독신 영업 사원의 빌라나 반쯤 귀가 먹은 노부인의 집도 번갈아가며 들락거렸고 음식은 편의점 쓰레기통을 뒤져 유통기한이 막 지난 음식들로 주린 배를 채웠던 그녀에게 옛 추억이 담긴 고보의 집은 어떤 의미였을까. 

비슷한 소재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오츠이치의 [어둠 속의 기다림]처럼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맹인 여인의 집에 살다가 적발되는 남자보다 [나가사키] 속 여인에게 동정심이 더 기울어지는 이유는 그녀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이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가족이 되지 못한 채 자신의 몸하나 의탁할 데 없는 그녀의 가난하고 쓸쓸한 시간. 그녀가 닫은 미닫이 문은 그 쓸쓸한 시간과의 차단이며,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의 단절수단이 아니었을까. 

노령층이 점점 증가하지만 그들에 대한 대책은 커녕 젊은 세대마저 일자리가 없어 백수가 넘쳐나는 시간의 끝엔 정말 이런 미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찔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2010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인 [나가사키]는 그런 우리의 우려를 현실에 토해낸 이야기였기에 편안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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