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번 진짜 안 와
박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나이 서른이 시계 바늘의 오후 세시쯤 도착한 시점이라고 비유될 때 고남일은 몇시쯤의 바늘을 지나치고 있을까.
같은 일년을 살아도 다른 나이로 계산되는 동물들이 있다. 고양이의 1년이 인간의 13살과 동일하게 계산되는 것처럼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되곤한다. 가령 28세라는 동일 나이를 두고도 여자와 남자의 살아가는 시간은 다르다. 제대후 학업을 잇거나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거쳐 시집을 갈까? 커리어를 쌓을까? 다른 분야로 옮겨탈까? 등등의 고민을 거치는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간과 함께 먹는 달력의 나이는 별 의미없이 느껴져버리고 만다. [15번 진짜 안 와]가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까닭도 그 깨달음의 끝에 있다. "삐뚤어져 버릴테다"와 비슷하게 "선을 넘어버릴테다"라고 외치게 된 고남은 유쾌하던 삶에 치질이 끼어들고 애인이 쑥 빠지고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게 된 서른목전의 나이에 발목잡혀 버리고 있는 자신을 내던지고 가볍게 비행기에 오른다.
한꺼번에 생긴 나쁜 일을 뒤로 하고 런던행을 택하기엔 그는 너무나 가진 것이 없었고 비전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며 계획따윈 없이 그저 발붙이게 될 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용감하지만 위험한 청춘. 딱 그짝인 고남일이 런던가려고 오토바이 팔고 기타팔고 방뺀 이유는 유흥이 통하던 여자들과 달리 영혼이 통했던 최근 여자친구를 붙잡기 위해서였는데, 미영을 놓치고 나서 비참해진 삶을 뒤돌아보다가 고성방가 끝에 내린 결론이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고 친구따라 강남 가는 격이 되어버린 런던행을 통해 그의 삶은 대반전을 이룩해냈다.
운명이 장난질을 걸어도 남일은 김태원식의 꿋꿋함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었는데, 미영으로 인해 걸린 단 한번의 브레이크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고 계속 떨어질 것만 같던 나락에서 두 발을 땅에 딛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미영을 만나고 잠시 머물 하우스를 구하고 영어학원을 등록하다못해 집을 렌트하더니 알바자리가 생기고 기타를 사게 되는 술술 풀려가는 운명을 맞이한 남일. 기회의 땅 런던은 남일을 "나미루"로 불리게 만들고 명곡의 탄생을 부추기고 있었다. 머피의 법칙을 벗어나 그나마 행운이 끼여있는 복불복의 세상으로 던져졌으니, 당연히 행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알바가게인 모시모시 스시로 가는 15번 버스는 그의 인생에 기회가 올듯말듯 안오듯, 진짜 안와 짜증나게 만들고 미영과의 관계는 물론 새로생긴 여자친구와 미영의 남자친구까지 4명이 엮인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어버리고, 급기야 비자문제로 강제추방을 당하기에 이르른다.
강제추방되는 귀국길...
영어도 늘었고, 곡도 늘었지만 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돌아와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화려한 부활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지는 가난한 삶과 반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음악의 길이어다. 역시 인생은 자고 일어나면 스타가 되어 있는 식의 "기적"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가운데 그래도 언제나 꿋꿋한 남일이 선택한 인생은 누군가와 같은 시간대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일이 멋지게 느껴져 응원하게 만든다. 평범하게 묻어가는 삶이 가장 어려운 삶이라면 남들과 달라 주목받기 보다는 외면당하거나 손가락질 당하게 되어도 가슴뛰는 일을 선택하는 삶은 용기있는 삶일 것이다.
남일이 바로 그런 삶의 주인공이어서 [15번 진짜 안 와]를 읽는 내내 유쾌하면서도 감동에 젖어들 수 있었고 마치 트루먼쇼를 보듯 남일의 일상을 시청하는 롹스피릿이 지구를 없애려는 양아치를 말리는 동안 함께 말려보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남일의 인생의 15번은 진짜 안온다. 타면 편하게 금방 도착할 수 있을텐데, 기다리면서 짜증스럽게 만들고 춥고 쓸쓸하게 만든다. 인생의 기회와 운을 뜻하기도 하는 15번 버스는 언제나처럼 늦게 오거나 안올 수도 있겠지만 남일은 그래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 정신이 롹정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는 이미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사람을 넘어서는 위대함을 행하고 있었다.
흔히 전문영역에는 그들만의 리그를 멋지게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쌓는 커리어가 성공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또 다른 장르에서 자신만의 리그를 뛰는 남일 또한 실패와 희망을 쌓아가며 세상이 자신을 알아줄 날을 향해 뛰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의 15번은 아직 도착미정이지만 GO!남일!!! 을 응원하게 만든다.
읽는 내내 김태원을 상상하게 만든 남일도, 이순재를 상상하게 만든 롹스피릿도 마지막 마침표와 함께 사라졌지만 이순간도 절망하고 있을지 모를 청춘들에게 소설은 희망의 빛으로 남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