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을 무렵 나는 조그마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책의 잔향이 오래남아 추후 어른이 되면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그때의 약속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지켜졌다. 이문열 작가의 책이 아닌 성석제 작가의 책으로. 

몰락한 영웅의 초라한 모습이 담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달리 [왕을 찾아서]는 이미 마음 속에서 죽어버린지 오래된 영웅의 마지막에 인사를 남기기 위해 찾아가는 원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초라해진 영웅의 모습보다 죽어버린 영웅의 모습이 더 멋진 것일까.  영화에선 까칠한 핸콕보다 죽어버린 슈퍼맨이 더 환호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은 추억속에서 살지 않고 현재의 시간을 함께 해야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영웅이라 표현되는 마사오는 어느 영웅들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다. 어느날 문득 나타나 마을을 휘몰아치듯 점령한 것이 아니라 나고 자라면서 그의 치부와 삶의 모습을 다 보여주며 살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환상을 가지고 대했다. 그 덕분에 그는 소문 속의 영웅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한때 지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였던 마사오는 광복 몇달 전에 출생해서 일본 이름을 얻었다. 일제 끄나풀이었던 아비와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이었던 어미의 아들로 태어나 결국 깡패가 되었지만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던 남자였다. 다만 열 일곱살에 서른 홀아비의 아이를 임신한 제 누이를 위해 놈의 눈을 낫으로 찔러 소년원으로 간 악행을 저질렀지만 마사오에게 그 일은 가족을 지킨 일이었고 정의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나쁘다 하진 못했다. 

일제 끄나풀이다가 해방되고도 경찰관이 된 그의 아버지는 6.25를 전후 해 마을에서 사라졌다. 애잔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처럼 그 시절, 그때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뭐라 덧붙여도 해답이 없을 것이다. 그 시대성에 대해 논한다해도 우리를 울분짓게 만들뿐 여전히 바로잡지는 못한 채 돌아가는 현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역중 배우 박근형의 말처럼 그 시절에도 자신같은 사람이 있고, 후에도 그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딱 맞는 대사였기에 마사오의 아비 같은 사람은 기회주의자의 삶을 살다 떠났다. 그의 식구들만 남겨둔 채로. 

옥살이를 하고서도 마사오는 돌아와서 터를 잡고 살았는데, 잠시 사라졌던 몇년의 세월에 대한 무용담이 뻥튀기 튀겨지듯 늘어나 그는 어느새 마을에서 가장 강한 사내로 소문나 버렸고 그건 어린 원두의 마음에 영웅의 새겨넣는 일이 되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의 쑥덕거림 가운데서 친화적인 영웅으로 함께 했던 [홍반장]과 다른 모습이긴 하나 마사오도 타인을 보살피며 살았는데, 자신은 병원치료를 받지 않았지만 다친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을 들락거려 꽤 많은 입원비를 외상해 놓은 것을 추후 마을 사람들이 보증서듯 갚아주겠다고 들고 일어선 일만 보아도 인심도 잃지 않으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  무슨 [포레스트 검프]에서처럼 "사단장은 결국 나중에 친구들과 짜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휘어잡는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짐작케 만들고 "예전에는 아흔아홉 굽이로 불렸던 고개다"는 식으로 배경을 상상하게 만들지만 소설은 무적의 마사오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원두의 추억과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난세는 영웅을 기다리지만 웬만해서는 영웅대접 받기 힘든 시대에 추억속 영웅이자 왕이었던 남자의 마지막을 향해 간 원두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웅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서 이미 왕은 죽어버렸고 그래서 그는 환상이 아닌 추억과 기억으로 그를 찾아갔다. 

세상의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사람만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작가의 표현이 문맥상의 의미와는 다르게 참 무섭게 느껴진다.  세상이 변해가는데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하고. 

그래서 한때는 왕이자 소년의 영웅이었던 남자와 한때는 소년이었던 남자의 추억이 어려있는 이 소설을 세월을 더 묵혀 다시 읽기로 마음 먹는다. 물론 약속이 또 다른 방향으로 지켜질지는 그때 가 봐야 알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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