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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고은규 작가의 [트렁커]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서만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유쾌한 만남 뒤로 밝혀지는 인연의 시작과 그 즈음해서 겪었던 아픔으로 인해 트렁크 속에서 잠드는 습관이 생겨버린 그들. 알고나면 결코 시원하게 웃을 수만은 없게 만드는 이야기가 트렁커였다.
누군가 평범하지 못한 습관을 지니고 있을때 질타보다는 숨겨진 사연에 귀기울이는 배려를 보여야 에 두고도 잠시 귀를 열기 위한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부디 아무런 편견없이 책이 이끄는대로 읽어나갈 수 있기를....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아베 고보는 1924년 도쿄생이다.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여러 상들을 수상했지만 가장 궁금하게 만든 작품은 [타인의 얼굴]이었다. 어떤 감동을 전달했기에 오우삼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페이스 오프]를 만들게 된 것일까. 작가인 동시에 극작가였던 아베 고보는 1993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만은 오늘까지 남아 읽는 이로 하여금 "소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스스로 얼굴을 없애버린 사람들....
[너는 펫]에서 상자에 담겨 온 사람은 그저 배달된 사람일 뿐이다. [홈리스 중학생]은 어느날 갑자기 터전을 잃고 가족과 흩어져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했던 일본의 개그맨이 겪었던 과거사가 담겨 있었고 그에게 그 시절의 놀이터는 주거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상자를 배달수단이 아니라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단 한번도 궁금해 본 적 없던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게 만든 작가가 바로 아베 고보였다.
[비비의 도쿄 다이어리] 중 p20엔 사전제품 상자가 찍혀있다. 앞에는 대문도 그려져 있고 기붕도, 창문, 화분까지 매직으로 그려져 있는 상자가. 그리고 이런 문구가 붙여져 있다. "이 상자는 엄연한 소유주가 있는 누군가의 집이다"라고. 이불,옷, 그릇,책과 인형까지 없는 것이 없다는 누군가의 집. 바로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 소설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의 거리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나는 소설을 읽어나갔다.
분명 노숙은 분명한데, 1990년대 노숙자를 일컫던 "상자인간"이 여전히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베 고보가 만들어낸 상자인간은 현대에 와서 분명 진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상자인간"일 뿐이다.
상자인간. 스스로 얼굴을 없애고 사는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이름이나 연령뿐만 아니라 모습도 타인에게 잘 내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삶을 사는 이와는 다른 삶을 택한 그들은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면서 구경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구경하는 주체가 되어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누구라도 보여지기 보다는 보고 싶어 한다....
누구라도 보여지기 보다는 보고 싶어한다면서 "상자인간"의 삶을 정당화 하지만 "나는 나의 추함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상자인간은 상자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전직 카메라맨이었던 상지인간이 상자 속에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자신의 눈으로 찍은 세상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실 특별한 것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자는 평생의 주거 공간이 아니라 곤충이 변태하듯 다른 세계로 탈피할때까지 머무는 공간인 것이다. 상자인간이라는 인간 번데기를 통해 그들은 달라지는 희망을 꿈꿨던 것은 아닐까. 믿음과 사랑이 만들어낸 선물이 "기적"이라면 "희망"은 기다림이 준 선물같은 것이다. 그래서 상자인간을 노숙자와 동급으로 두는 것은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진다. 노숙자는 거리의 삶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지만 상자인간은 잠시 머무르면서 더 나은 환경이 올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이니까.
스스로 얼굴을 없애버렸지만 인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상자인간". 옛날에도 지금도 나중에도 존재할 이들은 [트렁커]처럼 또 다른 종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