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산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느리게 사는 일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일텐데...속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빠르게 산다는 것의 반대말인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유하길 꿈꾸는 세상에서 속도도 방향도 중요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현재 내가 디딘 땅의 존재에 한없이 감사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 홀로 거두어 먹는 밭에서는 이웃 노인들의 권유에도 꿋꿋이 농약없이 버티어내고 사료를 걱정하면서도 개들을 품에 안고 가족처럼 놓질 못한다. 또한 그는 개가 어느날 물어죽일뻔한 새끼밴 염소를 살려 염소식구까지 끌어안는다. 자신이 놓는 순간 개는 보신탕집으로 염소는 건강식품집으로 팔려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윤 시인. 그는 홀로 사는 남자다. 아니 함께 사는 사람이 없는 남자다. 왜냐하면 개들도 있고, 이웃 할머니들도 있고, 염소들도 있지만 단지 그의 집에 함께 거주하는 사람을 들이지 않을 까닭이다. 이 홀로 사는 남자는 농사를 짓고 동물을 돌보고 몸에 노동을 익히며 "자발적 가난"으로 들어섰다. 부다처럼 수도자도 아닌데 자발적 가난으로 들어선 그의 인생이 기이하기만 하다. 그의 삶 앞에선 도시의 삶도, 성공의 삶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한다.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삶이 주는 고요한 행복감은 그들의 삶에서는 발견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게 느껴진다. 시인은 소통하면서도 자유롭게 사는 삶을 터득했기에 소통없이 그저 자연으로 회귀했던 작가의 삶보다 더 풍족해보였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자발적 가난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시인의 따뜻한 하루가 계속 전해지길 기대해본다. 책이든, 어느 매체를 통해서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