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것조차 사치인 순간..... 살다보면 꿈꾸는 것조차 사치인 순간이 있다. 동공 가득 눈물이 차오를만큼 슬픈 순간이지만 그럴때가 종종 있다. 어느 시인의 시에서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마는 가난은 사랑도 삶도 푸성귀처럼 푸석푸석하게 변색되게 만들어버린다. 누군가는 유흥비로 200,2000씩 낭비하며 살지만 또 세상 어딘가에선 단 돈 2만원에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 공존한다. 그래서 삶은 때때로 불공평하기 그지없다. [빵과 장미]라는 다소 예쁘게 포장된 제목 속에도 우리를 가시처럼 찔러대는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 단어를 통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생존권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들에 대한 가슴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 신경숙의 [외딴방]이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던 것처럼 [빵과 장미]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공장의 부품처럼 소모되는 그들. 그들에겐 내일에 대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치처럼 보여진다. 단 하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식의 성공인데, 어른들의 노동을 거름삼아 제 2의 탄생을 이루어내야할 그들의 어깨도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뜨거운 가슴울림의 공명... 꿈의 땅.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주한 민족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여러 미국 드라마 속에서 보여지는 라틴계,아시아계에 이어 소설에서는 이탈리아에서 건너간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로사의 가족은 이탈리아에서 이민와 아버지를 잃고 세 여인이 삶을 책임지고 있었다. 엄마와 언니는 공장에서 로사는 제2의 탄생을 위해 각자의 어깨에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로사는 점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에 괴로워하게 되고 배움터에서 한 발, 노동 현장에서의 한 발 이렇게 양발을 딛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고.... 또 한명의 인물 제이크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알콜 중독자 아버지의 부양을 위해 학교가 아닌 공장에서 일하지만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형편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엔 부랑자가 되어 로사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서 몰래 기거하기에 이른다. 무엇이 어린 소년을 거리로 내몰았을까. 주급 6달러 30센트. 그 중 6달러가 집세로 치러지면 나머지로 삶을 연명해야 하는 노동계급의 가난의 악순환. 일터에서는 최저의 복지도 이루어지지 않은채 생존권을 박탈당한 이들을 가난이라는 수렁으로 자꾸만 밀어넣고 있었다. 이쯤되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빵과 장미의 상징적 의미도 표면화 되어 나타나는데 인간은 빵만으로만 살 수 없기에 그들은 장미로 대변되는 인간의 존엄성, 즉 존중받을 권리를 위해 임금인상요구를 소리높여 주장하게 된다. 단순하게 단 한 푼의 임금인상을 원했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존엄의 가치에 대한 가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존엄의 가치... 1912년 미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 파업을 작가 캐서린 패터슨이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노동현실의 비참함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며 온몸을 불사질렀던 전태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종과 국가를 넘어 비슷한 노동현실과 그 속에서도 권리를 주장하며 내일 보장권을 주장하는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닮아 있어서일 것이다. 국민에게는 의무와 권리가 함께 주어진다고 우리는 학창시절에 배워왔지만 언젠가부터 눈앞에 보이게 된 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일터에서 의무만을 강요당한 채 소모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과 그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는 박탈당하는 현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바로 그때 느끼는 로사의 괴리감은 우리의 것이며, 로사의 시선 또한 우리의 시선과 동일시 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빵과 장미]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참 많은 소설의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내일을 위해 투쟁했던 그들에게 내일이 주어졌는가....를 떠올려보게 만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