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방
김미월 지음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사 갔다. 이사 왔다. 이사했다...
 
이사는 참 재미난 말이다. 어떤 말이든 옮겨 다닌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렇게 일상적이면서 평범한 단어가 소설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는데, 별다른 에피소드도 두 중심인물의 만남도 없이 철저하게 재미난 스토리를 완성해나갔다.
 
여덟 번째 방.
 
제목만으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로움이 묻어 있지만 정작 그 방의 중요성은 영화 [시월애]에서처럼 같은 공간에,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남녀를 품었던 곳이라는 정도일뿐 방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잠만 자는 방. 이라는 말에 혹해 월10만원의 방을 구경 왔던 영대가 문만 닫으면 시커먼 것이 딱 관이라고 해도 좋을 코딱지만한 지하 방을 덜컥 계약한 이유는 옆방에 사는 아름다운 여학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여학생과는 늘 마주치지 못한 채 정작 영대가 마주하게 된 것은 먼젓번 살던 이가 남겨두고 간 노트 몇 권이었다. 남의 것에 손댄다는 것은 너무 착해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곤 했던 영대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웬일인지 읽고 싶어져 넘겨 본 노트는 누군가의 일기이자 소설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 지영
 
그녀는 시골 해변 마을의 서점 집 딸이었고 친하게 지냈던 남학생 관은 무당의 아들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관의 식구들이 고향을 소리소문 없이 떠났고 시간이 흘러 서울로 진학을 한 지영은 다시 관을 만나게 되지만 이전과는 또다른 이질감으로 인해 그와 다시 헤어지게 된다. 동화 속 시골 쥐가 서울에 와서 모든 것에 혼란을 느끼듯 지영의 혼란은 환경과 시국 둘 다에서 온 것이었다. 반면에,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되는 일도 없는 스물 다섯 청년, 영대는 지영의 방으로 들어온 첫 사흘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왜였을까? 하지만 곧 정신 없이 잠에 빠져버린 영대. 그리고 "이제는 당신을 용서하려 합니다."라고 잘못 전달된 7814로부터의 문자 한 통. 그 문자의 주인공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영대가 지영의 노트를 다 읽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노트를 읽는 영대의 속도와 잘 맞게 도착하는 문자들. 마치 추리물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양념 같은 문장에 이끌려 소설 읽기는 계속 진행 된다.
 
우리에겐 소설 속 인물이지만 안에선 노트의 독자인 영대의 경우, 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평범한 녀석일 뿐이지만 바로 그런 면에서 영대와 지영은 닮아 있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 살아가는 주변인들과는 다르게 욕망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대안 점을 찾지 않는 그들의 모습. 어쩌면 남자로 태어나면 영대, 여자로 태어나면 지영으로 살고 있을 이 땅의 모두에게 그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로 쓰려고 작가는 소설을 활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 시작했다.
 
이제 노트로 인해 타인의 삶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 영대와 고백적 글쓰기를 통해 소통을 시작한 지영. 그들이 잠시 머문 작은 방은 그들로 인해 소통의 장소로 승화되어 여덟 번째 방은 그들에게 더 이상 잠만 자는 방이 아니게 되었다.
 
드라마와 영화화 되기보다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연극처럼 상상의 영상을 돌리게 만드는 [여덟 번째 방]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지영이 죽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해둔 자신의 노트를 두고.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엔 영대와 지영이 만나는 순간을 꿈꿔보았고, 세 번째 읽기를 끝낼 때 즈음해서 잠만 자는 여덟 번째 방의 비밀에 대해 눈치 채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크게 부각대지도 않는 작은 방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끝맺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방들 역시 그런 역사와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청춘이라는 시간이 20대 젊은이들 저마다의 사연을 전당포 물건마냥 맡아두고 있는 것처럼...
 
같은 세대를 살아온 작가의 작품이기에 낯선 감 없이 익숙하게 여겨졌고 또 누군가에게 소설의 내용을 들려주게 되더라도 나의 이야기처럼 쉽게 풀어 알릴 수 있는 재미로 남아 그들의 사연은 오늘도 나를 책상 앞으로 당겨 앉혀 놓는다.
 
이사 갔다. 이사 왔다. 이사했다.
모두가 정답인 이 문장 속에서 나는 묘한 울림을 발견해낸다. 소설을 읽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시제도 제각기인 이 짧은 문장 속에 우리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가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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