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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사랑.
이 단어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단어이지만 이 소설에는 적합하지 않다. 가볍고 통속적이며 젊은 취향의 단어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아이링의 소설과 퀼팅하기엔 가볍다.
대만작가 경요에 열광했던 10대를 보낸 시절이 있긴 하지만 그 외 중국 작가들은 일본 작가들만큼 작가주의에 물들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저 그 한 작품만으로 단발성 독서에 그치고 작가별로 찾아보게 만들지 못했는데, 그들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무게감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좀 더 재미난 것을 찾아 고르는 나와는 입맛이 서로 맞지 않았다.
사상이니 사회적 이즘이니 하는 것들은 얼리어댑터적인 것에 열광하는 우리들에겐 누군가의 이야기일뿐 우리들의 이야기로 녹아내진 못하는 그런 류이니까.
그러나 장아이링의 소설만큼은 색달랐다. 그녀는 굵직한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털처럼 가벼운 유머로 우리를 휘어감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작가고 대중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작가다. 둘 다의 균형을 잘 잡고 있으면서도 그 길이감을 계산할 줄 아는 똑똑한 작가이기도 하다.
명문가의 영애로 태어나 전쟁 발발 속에서 나이 많은 친일파 관료와 결혼했던 장아이링. 두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다 외롭게 숨진 그녀의 고독.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영화의 러닝타임을 보며 소설의 길이가 단편 한 권 정도나 장편 한 권 정도의 길이는 되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깜짝 놀랐다. 원작을 찾아 읽으면서 그 몇 장 안되는 짧은 길이 속에 영화 한 편의 스토리가 다 들어 있어서 놀랐고, 짧은 단편을 시나리오화 해서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열정과 대담성에 또 놀랐다.
리안 감독의 말처럼 소설은 너무나 훌륭했다. 학생이지만 국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고 맥부인이 된 왕지아즈. 결국 타겟을 사랑하게 된 이 여인이나 아무도 믿지 못하다가 평생 유일의 지기를 만났지만 그녀를 버려야했던 한 남자의 꺾여진 사랑. 색,계는 야한 영화가 아니라 슬픈 영화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매국노였을망정 소설 속에서 이선생과 왕지아즈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불쌍한 인간류였다.
목숨을 건 무대 위, 그 속에서도 사랑은 싹트기 마련인가보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의 고독을 알아본 연민의 정을 함께 나눈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사람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왕지아즈의 독백과 왠지 서글퍼 보이는 이선생의 미소.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무쳐져 좋은 작품이 탄생되었다.
장아이링만의 필체. 펄벅이나 박경리 작가의 문체와 마주친 것처럼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는 그 무게감이 좋아 다음 작품도 찾아 헤매게 될 것 같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