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 잉글랜드의 가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 많았던 한 여자는 죽고, 한 많았던 다른 여자는 여왕이 되었다. 봄 꽃에 벌들이 날아들듯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남자들. 권력과 외모 그리고 힘을 가진 그들을 물리치며 꿋꿋히 싱글 퀸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던 엘리자베스. 영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그 칙칙한 화면과 음산스러웠던 날씨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왕이 되면서 얼굴에 하얗게 납칠을 하고 나타났던 그녀의 슬픈 얼굴도. 영국왕실의 고대사를 소재로 삼아왔던 필리파 그레고리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은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조선의 장희빈처럼 언니의 남자나 다른 여자의 남자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이용해 왔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았다. 달콤하게 소설을 써 오던 필리파가 이번 엘리자베스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신자 로버트 더들리. 모든 여성들을 꼬실 수 있었던 바람둥이 그는 여왕의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왕 주변의 여성과 밀회를 즐기는 등의 대담성을 보여왔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최고 권력자의 부군이 되기를 탐한 그의 권력욕. 자신의 집안이 몰락한 이유가 그 탐욕에 있었는데도 그는 역시 더들리 가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얻지 못하는 자로 전락했다. 여왕과 신하가 사랑에 빠졌지만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리한 여자였다. 결코 착한 여자가 아니면서 그녀는 나쁜 여자인 평판을 즐겼다.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과거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그녀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그녀를 미워하게 되지도 않는다. 처세에 강하고 현명했다는 판단밖에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