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스파이 유리
박현숙 지음 / 좋은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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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유리는 똑똑했다. 혼자 로켓을 만들어 발사시킬 정도였지만 오히려 이 점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미 해군함정으로 위장한 채 북한 간첩들이 쉽게 남한으로 침투할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소련 정보수집함으로 로켓이 돌진해 버렸던 것. 이 사실도 모른 채 자신에게 접근한 낯선 이들이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던 유리는 그만 납치되고 만다.

납치한 중학생을 KGB 스파이로 양성한 소련

시골학교 교장 선생님의 외동아들로 자유롭게 자랐던 유리는 납치된 후 갖은 고문과 구타 속에서 끊임없는 조사를 받았고 자유를 잃어버렸다. 이후 KGB 요원으로 양성되어 신분을 위장한 채 모스크바-평양-서울에서 첩보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재미로 로켓을 만들어 쐈을 뿐인데, 인생이 180도 달라져 버렸다.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까지 마스터한 유리는 이제 순진하게 술술 대답했던 1968년 납치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신을 지킬 줄도 알았다. 또 KGB가 요구하는 난제들을 노련하게 성공시켜나갔다. 보상과 승진이 뒤따르는 삶이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와도 가까이 지낼 수 없었던 '스파이'라는 위치는 그를 외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가족과도, 사랑하던 여인과도 이별해야만 했던 유리는 납치된 지 18년만에 한국으로 파견되었지만 가족은 이미 한국을 떠난지 오래였고 설상가상으로 활동 중 KGB는 해체되고 만다. 이제 그의 인생은 낙동강 오리알처럼 변해버린 듯 했다. 그것도 소설이 끝맺음되는 시점을 몇 장 남겨두지 않고서. 소련으로의 복귀를 포기한 채 부모님이 계신다는 미국으로 가볼까? 고민 중이던 유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궁금하다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볼 것을 권한다. 급진스런 마무리 같아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책장을 덮고 생각하니 가장 유리스러운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으므로.


'스파이','첩보원'이 소재인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방영중인 드라마 중 '패밀리'는 코믹이 가미되었고 영화 '미스터 & 미스 스미스'엔 로맨스가... 스테디인 '007시리즈','본 시리즈'는 숨막힐 듯한 첩보전과 액션이 재미를 더했다. '스파이'라는 같은 소재지만 풀어내는 방식에 따라 그 장르와 재미가 달라져 <KGB 스파이 유리>는 읽기 전까지는 어떤 느낌의 스파이 소설일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실종된 중학생이 주인공이므로 슬픈 분위기를 자아낼 수도 있겠고 '블랙 위도우'처럼 스파이 양성소에서 길러진 소년의 액션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책의 전개가 생각과는 좀 달랐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괴롭힘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한 그가 달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고 자신도 모른채 유명한 사람들과 스쳐 지나치기도 했다. '스파이 유리'도 그랬다. 신분을 위장한 유리가 도청을 하고 첩보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안 독자들은 그가 파견된 국가와 인접국의 정세를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낯선 이에게도 자신이 홀로 집에 있음을 의심없이 술술 불었던 순진한 소년이어서였을까. 하루 아침에 자유가 사라지고 체제가 달라진 속에서도 생각보다 그는 잘 적응해나간다. 그래서 <KGB 스파이 유리>는 납치 후 스파이가 된 소년이 아니라 스파이로 길러진 소년에 관한 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때로는 잘 적응하기 마련인가보다. 언제 제거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긴장된 삶 속에서도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고 욕망에 충실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가장 유리스러운 선택이었다지만 결말이 달라졌다면 어땠을까. 또 남한에서 공작을 이어나가는 중 유리를 알아보는 인물이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스릴감 더해진 상상을 그려본다.



* 서평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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