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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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문장에서 언급된 '희령'은 사람 이름이 아닌 도시 이름이다. 열 살 때 처음 간 희령의 기억이 사찰에서 나던 향냄새라고 했으니, 이유는 미루어 짐작이 갔고 두번 째 방문이 서른두 살이라는 대목에서 그리 빈번한 왕래는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혼 한 지, 한 달. 육 년을 산 집을 정리하고 희령 천문대 연구원으로 내려와 있는 딸을 보러 온 엄마가 지연에게 한 말들은 상처를 보듬어주는 말이 아니라 상처에 소금을 붓고 짓이기는 말들이었다. 현실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천륜을 끊고서라도 그냥 엄마없이 사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지만 실제로 모녀 사이에선 조심없는 말들이 건네지기도 한다. 뻔히 상처가 될 말인 걸 알면서. 너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에 든다.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P17)라니. 조선시대 여인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기본적인 일들에 감사해야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급기야 사위가 바람을 핀 걸 알게 된 후에도 엄마는 사위편을 든다. 딸의 이혼으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전 남편이 자살이라도 하면 책임질 것인지, 심지어 바람핀 사위에게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하는 엄마라니.....시어머니도 아니고 친정엄마의 이런 행동들을 다 감내해야만했다니.....채 10페이지도 읽지 않았는데 그만 울화통이 치밀고 말았다. 뭐 아빠라고 다르지 않았다.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라니. 바람핀 사위로 인해 상처를 입은 쪽은 자신이 낳은 딸인데.

계속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랑 사이가 좋지 않아 그동안 왕래가 없었던 할머니를 다시 만나면서 이야기의 재미는 급물살을 탔다. 손녀인 지연이 자신의 엄마와 닮았다며 백정의 딸이었던 증조모가 위안부로 끌려갈뻔 했으나 천주교인인 아버지를 만나 야반도주했고 혼인하여 개성에서 살았던 시절 스토리로 이어지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들의 결혼을 도왔던 새비부부. 돈 벌러 일본에 갔다가 히로시마 원폭에 피폭되어 돌아온 새비 아저씨. 그가 죽은 후 새비네와 증조모인 삼천이네는 만났다 헤어졌다 하며 인연을 이어나갔고 그 사이 전쟁을 겪기도 했고 할머니는 장성해 결혼을 했으나 중혼으로 자신이 낳은 딸을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일을 겪기도 했다. 자신의 친 아버지가 가족을 속이고 버젓이 아내와 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시키는 바람에.반면 새비부부의 딸, 희자는 먼나라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파혼까지하며.



삼천이, 새비, 영옥이, 미선이, 희자, 명숙 할머니, 지연이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다. 시대의 흐름으로 나뉘지 않았다. 자식을 함부로 대하는 남편에게 당당하게 따져 묻는 증조모가 있는 반면 지연의 엄마는 자신을 함부로 대해온 시동생에게 따박따박 따지는 딸을 오히려 나무랐다. 할머니와는 차분차분하게 소통하던 손녀 지연은 자신의 엄마인 미선과는 각을 세웠고 손녀와는 편하게 얘기하던 할머니도 딸인 미선과는 오랫동안 보고 살지 않았을만큼 틀어진 사이다. 읽다보면 소중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이 아니다. 성향의 문제고 표현의 문제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참 깊고도 오래간다. 소설의 끝맺음에서도 말끔하게 걷히진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와 손녀의 만남이 중간에 낀 엄마라는 존재에도 영향을 끼쳐 조금씩 그 관계에 기름칠이 더해지는 것으로 '화해'보다 더 값진 '지속'의 길을 열어두는 듯 했다. 무엇보다 세대를 걸쳐 이어진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라 초반에 솟았던 울화통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조용히 잠재워졌다.




P14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P134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P195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P298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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