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SF #2
정세랑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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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avve에 걸려 있는 시네마틱 드라마 <SF8>을 지나치면서 '나는 SF물을 얼마나 봤던가?' 잠깐 생각해봤지만 막상 떠올려지는 제목은 없었다. 스타워즈나 E.T 정도였달까. 반면 [별빛속에],[아라크노아],[레드문],[1999년생]은 만화를 통해 봤고 최근엔 신일숙 작가의 [카야]를 웹툰으로 보고 있다. 관심밖의 소재들이 아니란 얘기다. 흥미로웠고 꽤 심도있게 빠져들어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탄복하기도 한다.

 

글로 읽으면 어떨까. SF 무크지 <<오늘의 SF>>는 '지'라 이름 붙여져 있지만 얇고 넓은 잡지 형태가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두께의 한 책권으로 묶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 그 개성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로로 찍힌 제목과 앞 표지 가득한 목차, 돋보기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큼직한 인트로 글씨체와 비교되는 일반적인 본문 글씨체. 인트로-인터뷰-크리틱을 지나 시작되는 소설들과 리뷰에 칼럼까지....여러 재료가 섞인 잡채마냥 다양한 볼륨감으로 글읽게 만드는 책의 매력은 생각보다 참신했다. 동떨어지지 않았고, 낯설지 않았으며, 지루하지 않았다. 편집에서부터 내용까지.

 

글자 크기가 달라져 있음을 깨닫고 나면 페이지는 베이지빛 너머 흑색의 길로 접어든다. 익숙해질 무렵엔 다시 페이지가 환해진다. 고속도로 운전을 하다 터널에 접어들고 그 끝에서 빛을 향해 달려나왔다가 또 다른 터널을 만나듯 읽는 내내 여행하는 느낌마저 더해진다. 게다가 읽을거리까지 풍성했으니.....지난 한 주는 <<오늘의 SF>>에 푹 빠져 지냈음을 고백한다.

 

'멍석을 깔아주면 활활 태워 버리고 싶다. 그림을 그리지만 캔버스보다 영수증 구석이 편하다 (P19) '는 박문영 작가의 에세이가 드러낸 솔직함은 살짝 서글펐다. SF를 쓰는 사람의 머릿 속엔 우주가 열 두개쯤은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열심히 사는 SF 작가를 끌어내려 한참 주눅들게 만든 현실도 서글프고 '겹치는 소재일 때 대체로 타인의 것이 더 훌륭하다'는 대목에서는 먹먹해졌다. SF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인입되어 생각이 좀처럼 남의 일같이 분리되지 않았다. '반년 치 소설 인세로 한 달 치 통신비를 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울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택한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쉬운 선택이 아님을 알기에. 분명 '에세이' 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SF처럼 읽힌 건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돌아가고 있어서일까.

 

 

수록된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나게 읽은 소설은 정소연 작가의 '수진'이다. 학교 다닐때 '현정'이라는 이름만큼이나 흔했던 '수진'이라는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걸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최수진, 이수진, 김수진.....떠올려보면 동창 중에도 수진이라는 이름이 꽤 여럿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정'에겐 여섯 명의 수진이 있다. 아버지가 달랐던 친언니부터 초등학교 동기, 첫사랑, 하우스 메이트를 소개하는 부분까지는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 '수진'을 소개하면서부터 이 소설이 SF임이 드러난다. 종종 미정의 물건에 손을 대던 친구와 달리 깔끔한 메이트인 네 번째 수진은 둘이었다. 어느 날 마주하게 된 다섯 번째 수진은 네번째의 카피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폐원으로 직장을 잃은 수진이 성형외과 상담 대신 클론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돈도 벌고 첫사랑까지 다시 만나게 된다. 남편 몰래 자신과 똑닮은 클론이 필요하다는 세 번째 수진은 비싼 모델을 샀고 그동안 은행잔고가 두둑해진 미정은 아파트를 사서 독립했다. 그리고 네 번째 수진으로부터 여섯 번째 수진을 선물받으면서 평화로워졌다며 소설은 끝난다.

 

이름만 같았을 뿐 미정을 스쳐지나간 '수진'들은 각각 다른 역할이었다. 커밍아웃 후 관계가 단절된 사람도 있고 설레는 사람도 있었으며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준 이도 있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게 쓰여졌지만 복제 인간이 등장하는 '수진'은 분명 SF 소설이다. 어려워서, 과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관심 밖의 분야라서....등등의 이유로 SF를 멀찍이 둔 사람들이 가볍게 시작하기 좋은 초단편인 셈이다. 오히려 읽고나서 좀 더 생각이 많아진 글이기도 하고.

 

<<오늘의 SF(2)>>는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좋을 내용이다. 목차를 보고 관심이 동한 글부터 찾아 읽다가 한 권 읽기를 끝내기 딱 좋다. 그래서 이동 중에 읽기도 하고 약속 전 시간이 잠시 남는 틈을 타 읽기도 했다.

 

■ 한국형 SF라는 말은 많이 쓰는데, 거기서 '한국형'이 떨어져 나가고 SF로 소비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요 (민규동 감독/ P57)

■ 장르를 막론하고 좋은 글은 분명한 목적지에서 시작된다 (김창규 작가/ P270)

 

 

* arte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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