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어당김의 힘 - 아브라함의 창조비법
제리 힉스.에스더 힉스 지음, 박행국 옮김 / 나비랑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크릿 동영상에서 대부분의 나레이션을 맡았던 에스더 힉스. 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내용의 신뢰도를 어느 정도는 높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른 출연진과 마찬가지로, 유투브에서 그녀와 관련된 동영상을 찾아보다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강연 시작 전, 심령술사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이 에스더 힉스와 제리 힉스 부부의 강연을 듣고 영감을 받아 시크릿 동영상과 책을 출판했다는 알려진 바대로, 책은 시크릿에서 소개되었던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설명하고, 나아가 의식적 창조과학과 허용의 기술, 시간 마디별 의도하기등 시크릿엔 없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야 이미 잘 알려진 개념이고, 나도 그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존재에 관한 의문일 것이다. 사실 지금도 아브라함의 존재와 아브라함이 제리와 대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100퍼센트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기 조금은 껄끄럽다. 아마도 영매를 통해 귀신과 대화하는 유사한 방식에 대한 부정적 감정 혹은 편견이 있어서겠지. 아브라함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적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로 나뉘는데, 아브라함은 비물질적 세계에 존재하는 영적인 선생들(안내자들)의 집합적 명칭이다. 그리고 시크릿 류의 다른 책에서 다루어진, 잠재의식의 창조적 지성 혹은 지혜의 신성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책에선 내적자아로 불리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비슷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우리의 내적자아는 형태를 달리하여 여러 번 물질 세계에 오게 되었으며, 이는 각기 다른 생에서의 경험(자료수집)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기 위함이며, 따라서 우리의 내적자아는 창조부터 시작된 지금까지의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는 위대한 지혜이며,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현재의 생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하기 위함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적자아와 자기 자신과의 교류는 감정 시스템을 통해 전달되는데 내가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있든지, 기분 좋은 상태에 있으면 내적 자아와 일치를 이루며 조화롭게 흘러가는 것이고 반대로 기분이 나쁘다면 뭔가 잘못되 가고 있는 것이므로 즉시 그것에 주의를 거두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인데,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은 이런 개념은 다른 책에서도 이미 비슷한 형태로 언급되었던 바라서, 더 신기했다. 다른 종교 문화권에서도 거듭 얘기되고 있다면, 진실이 아닐까?

 

저자 제리처럼 우리는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하는 근원적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제리에 의하면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비물질적 존재가 물질적 존재로 태어난 존재이며,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자료수집 즉, 지식의 데이터 베이스에 자료를 추가하고 그를 통해 재미를 느끼는 것.

 

이 명쾌한 해답과, 상당히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개념 설명, 실천하고 싶은 방법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전적으로 그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든가,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이 최선의 미덕인 그리고 그것이 때론 이기적이어도 용인되는, 옳고 그르다든지 선과 악의 개념 없이 오로지 내가 즐거우냐 아니냐만 가치 판단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 말대로 내가 즐겁지 못하면 남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므로. 

 

하긴, 도덕관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에서, 학교에서 주입당한 하나의 사고체계에 불과하지 않나. 예전에 한 외국인 친구가 자기 아버지가 선과 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난다. 신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선하다고 해서 꼭 좋은 세상인 것만도 아니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악하다고 해서 꼭 나쁜 세상인 것만도 아닌,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자기 스펙트럼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그와 같은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선과 악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오랫동안 몸에 배인 생각의 틀을 부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인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아직은 좀 뭔가 걸리적거린듯한 찜찜한 기분을 벗어버리고 강력한 진동체가 되기 위해, 한 번 믿어 볼란다. 그리고 좀 더 공부해 볼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조지 오웰이구나!!!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젠체하거나 겉멋들지 않은 소박함속에 묻어나오는 진정성, 이론가이기 전에 실천하는 행동가로서의 면모, 진지한 문장 속에도 드러나는 유머감각. 작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적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언가가 조지 오웰에겐 확실히 있다. 그의 작품을 차례차례 읽으면서 어느덧 그는 나의 no.1 작가님이 되버렸으니. 

 

영화 '빌리 엘리엇'이나 '브래스트 오프' 에서 광부들의 이야기가 종종 다루어지는 것을 본 터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영국 역사상 탄광촌이 시사하는 바가 꽤 큰가 보다 짐작해 본다. 아마도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광부들이란 경제 생산과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충분히 그 댓가를 보상받지 못한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상징적 존재 같은 게 아니었을까. 

 

1부는 한 독서 클럽의 의뢰를 받아 조지 오웰이 직접 북부 탄광촌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작업하고 거주하면서 관찰한, 열악한 노동 환경과 주거 문제, 비참한 실업 문제를 신파끼 쫙 뺀 사실적 필체로 기록했으며, 2부는 사회주의자로서, 파시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를 효과적으로 전파시키기 위한 전략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는 중하층, 계급의식으로서는 상류층으로 태어난 자신의 성장 배경과 버마에서의 경찰 근무 경험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1930년대, 그것도 남의 나라 영국 광부들의 비참한 삶이라니,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화폐 개념과 빈약한 상상력만으로 그 고충을 생생하게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고, 명확히 기술되지 않은 조지 오웰의 모호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책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할 수 있겠으나, 웃기게도 이런 결점들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강한 공감대가 2011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나에게 형성된다. 특히 사회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그 스스로 사회주의 비판자가 되어 던지는 질문과 답변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예리한 분석력과 이해하기 쉬운 탁월한 해석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런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혹은 뒤늦게 돌리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후진성으로 받아들여야 할런지. 아님 조지 오웰의 천재성으로? 이 책에 씌어진 이야기는 우리와 꽤 다른 시대, 공간,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다. 특히 파시즘의 득세를 막기 위해 모든 좌파가 견해차는 잊어버리고 일단 단결할 필요가 있는 절박한 순간에 와 있으며 압제가 타도되기를 바라는 본질을 잊지 않는다면 절대 엉뚱한 사람들과 제휴하는 위협은 없을 것이라는 부분에서, 며칠 전 민주당과 시민 연대의 통합 과정이 오버랩되면서 , 정말 기똥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책이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과연 기쁜 일인가 슬픈 일인가.

 

*책 접기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없이 살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 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듲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략- 당신도 나도.... 동성애자 시인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아무개 동지도 <유아를 위한 맑시즘>저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매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

 

'전쟁 이후로 시장은 제대로 못 벌고 못 먹는 사람들의 수요에 맞춰 적응해야만 했고, 그 결과 오늘날 사치품은 거의 대부분 생필품보다 저렴해졌다....3페니로 고기는 얼마 못사지만 피시 앤드 칩스는 충분히 살수 있다...단연 돋보이는 것은 모든 사치 중에서도 가장 값싼 도박이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라 해도 당첨금에 1페니를 걸어봄으로써 며칠간의 희망을 살 수 있는 것이다.........아울러 배곯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퍼부어 주는 오늘날의 전기 과학이 빚어내는 진풍경도 가관이다. 이불이 없어 밤새 떨다가도 아침이면 공공 도서관에 가서 샌프란시스코나 싱가포르에서 전송한 뉴스를 읽는게 오늘날인 것이다. 영국에선 2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먹는 것에서 생기는 결핍을 전기로 채우는 셈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부 강탈당한 상당수의 노동 계급이 생활의 표피만을 누그러뜨리는 값싼 사치로 부분적인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후에 값싼 사치가 발달한 것은 우리의 통치자들에겐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피시 앤드 칩스, 인조견 스타킹, 연어 통조림, 할인 초콜릿, 영화, 라디오, 진한 차, 축구 도박 같은 것들이 혁명을 막은게 사실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그렇다면 그는 과연 정말 타도를 원할까? 확고부동한 압제에 맞서 싸우는 그를 붙들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모든 견해는 현실을 최초로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이런식의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은 모든 진보적 견해에서 발견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셉 머피 잠재의식의 힘
조셉 머피 지음, 김미옥 옮김 / 미래지식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크릿' 추종자다. 책은 물론이고, 시크릿 동영상을 아마 수십번은 봤을 것이다. 나아가 동영상에 출연하는 모든 출연자들의 책이며 동영상 강의까지 유투브에서 찾아볼 정도로 나는 소위 시크릿빠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그런 post 시크릿 과정에서 이 책의 존재도 알게 됬을 것이다. '시크릿'식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이 책을 아주 강하게 끌어당긴 셈이다.

 

<시크릿>을 보면 알겠지만 'universe'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어느 사회/문화에나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혹은 양자 역학 측면에서 본다면 'energy'라고도 설명된다. 나의 소원을 무한정 들어주고 나의 요청에 가부 응답을 보내주는 알라딘의 램프, 지니같은 존재,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에 언급된 대로 사람은 누구나 이해하게 되면 믿게된다. 물론 기독교에선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치 말고 일단 무조건 믿으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해없는 맹목적 믿음이 어찌 완전하다 할 수 있으리오. 믿고 싶었고 그래서 그 존재에 대해 정말로 이해 하고 싶었다. 하나 <시크릿>에서도 그 존재 -universe 혹은 초월자, 에너지 혹은 그 무엇이라고 불리든 간에- 부분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없이 두루뭉술 넘어가고 있기에,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고, 이 책이 그런 나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좀 더 과학적으로 채워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설레는 맘으로 정말 재밌게 읽었다. 

 

성경구절을 통해 자신의 잠재의식론(?)을 뒷받침하고 있긴 하지만, 그 보다 이 책에서는 신(하느님)이나 universe대신 '잠재의식(의 창조적 지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의 궁극적 본질과 역할은 이미 시크릿에 등장한 universe등등등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단지 그 존재를 우주나 신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잠재의식이라는 보다 구체적 대상으로 정의하고 있어 뭔가 과학적 검증과 설명 가능한 실질적 대상을 찾고 있던 나에게 더 반갑고 설득력있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과 잠재의식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하에 -우리의 생각은 대뇌피질의 신경점화 패턴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런 생각이 완전히 마음(뇌)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더 깊은 부분 즉 잠재의식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작동하게 되는데 이 때 잠재의식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멈춤없이 24시간 활동하고 있으며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가치판단 중립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반복적인 생각(의식)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잠재의식에 스며들고 잠재의식은 이를 현실에서 발현시킨다. 우리는 이런 원리를 이해하고 잘 이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바를 믿음을 가지고 - 왜? 의식영역에서 의심을 가지게 되면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잠재의식 속에 충분히 심을 수 없으므로- 반복적으로, 사진을 찍듯이 영상화 시키면 현실에서 이루어 진다는 논리다. 

 

잠재의식의 작동 기제에 대한 부족한 설명이 있긴 하지만 <시크릿> 보다는 훨씬 과학적 접근이어서 좋았다. 물론 내가 원한 것은 좀 더 구체적 설명과, 실험에 뒷받침된 검증과 자료들이었지만, 잠재의식의 영역은 아직 미개척 분야니 아쉽지만 봐주고 넘어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잠재의식의 이런 역할들을 알아냈고 또 이 잠재의식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항상 조화와 건강과 평화를 향해 움직인다는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단지 직관에 의한 발견 혹은 사실이라 주장하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자면 부와 건강을 포함한 개인 혹은 인류의 행/불행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 접근 없이 오로지 한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적용하느냐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에 비춰볼 때,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데 부족함은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시크릿>의 심화학습서인양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여 일상생활에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 그것이 당신인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이런 저런 원리등을 다 떠나 인간사 절대 진리인 것 같아 마음에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향과 분노 - 개정판
윌리엄 포크너 지음, 정인섭 옮김 / 북피아(여강)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로드 짐 이후로 간만에 정말 읽기 힘든 강적을 만났다. 그래도 로드 짐은 참고 끝까지 읽길 잘 했단 생각이라도 들었지. 체감 가독 지수는 로드 짐보다 두 세배는 낮으면서도 다 읽고서도 왠지 살짝 배신감 드는 이 책. 운동으로 치자면 마치 마라톤 풀 코스를 뛴 듯 한 피로감이라고나 할까.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쉽게 몰입이 되지 않은 탓에 2부까지 읽는데 거의 한 달 이상 걸린 것 같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 장마다 다양한 인물의 시점으로 풀어나가는 서술 방식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백치 벤지의 시점으로 구성되는 1부 부터 오르막의 고비가 시작된다. 사건의 선/후가 뒤죽박죽인 서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다양한 등장 인물들, 게다가 중복되는 이름(제이슨,쿠엔틴, 벤지, 모리,벤자민...), 어디가 한 인물의 대사 끝이고 어디가 다른 인물의 대사 시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문장 처리와 부호의 생략들이 특별한 사건없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자살한 쿠엔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2부에선 번역의 미숙함이 문제인지 원문 자체가 그런건지, 의미 파악조차 힘든 장황한 문장들 때문에,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다행히 제이슨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3부와 작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4부는 훨씬 수월하게 읽히긴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남은 건 허무함과 배신감 비스무리한 감정 뿐이랄까.  

 

남부를 지리적 배경으로,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과 붕괴라는 소재를 하루-<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혹은 나흘-<음향과 분노>-이라는 지극히 짧은 제한적 시간의 틀 속에 가두고, 현미경을 들이대듯 확대 후 다양한 각도에서 세밀하게 해부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자잘하고 구질구질한 불행과 몰락을 직접 지켜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 특유의 개성있는 색깔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근친상간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쿠엔틴, 캐디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벤지, 공허한 답변 뿐인 무능한 아버지, 열등감과 허세 의식에 사로 잡힌 엄마, 상대적 박탈감과 책임감에 시달리는 제이슨, 이들을 지켜보는 딜시등 인물 개개인에 대한 입체적 탐구와 그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천착이 모자랐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이 인물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왜 인물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독자를 충분히 이해시키는데 부족했고 - 특히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혹은 저질렀다고 믿는 쿠엔틴과 캐디의 관계 설정-, 따라서 사건들 -뭐 쿠엔틴의 자살외엔 특별한 사건도 없긴 하지만-에 대한 개연성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런 아쉬운 점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강한 주제 의식이나 강렬한 스토리도 없었으니, 아쉽게도 작품이 갖는 이름값 만큼의 존재감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십년 동안 수인 생활을 한 사람의 삶은, 그 죄질과 처벌의 정당성을 떠나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더구나 스무살 청년의 뜨거운 청춘으로부터 불혹에 이르는 긴 세월을 그에게서 앗아간 죄목이 억울한 시대의 억울한 산물이었다면? 나라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본인은 그렇다쳐도,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또 어땠을지. 그래, 아마 뭐라도 쓰지 않고서는, 뭐라도 읽지 않고서는, 뭐라도 남기지 않고서는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편지 이상의 편지가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부모님께, 형제들과 형수님, 계수님께 보내진 그의 편지들을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증하고, 채찍질하면서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런거 있지 않나. 사춘기 시절, 자신과 세상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로 부글거리는 뜨거운 심정을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나에게 있어 그 분출구이자 자신과 소통하는 통로는 일기가 아닌 편지였고, 편지를 쓰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내가 정리되고, 그래서 그것이 결국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편지이자 발견이랄까. 물론 저자의 편지는 나의 얼치기 사춘기적 편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치열한 고통과 자기 수양의 산물로서 뜨겁고 또 차가운 통찰이겠지만 왠지 펜을 들어 편지를 써 내려갈 때 그의 느낌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자신에 대한 확인과 검증, 자신과의 싸움에서 정체되지 않고 발전해 가고자 하는 팽팽한 긴장감과 처절한 의지같은 것들.   

저자 아버지의 편지처럼 그의 글 또한 수식과 감상 등 일체의 낭비가 배제된 담담함 속에, 그의 사색의 주된 화두들인 인간, 실천, 연대, 나눔, 역사인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져 있으며, 맘 놓고 푹 쉴 수 있게 차라리 감기라도 걸렸으면 좋겠다 할 정도의 엄격한 자기 관리, 나아가 자기 성찰을 통한 자기 변혁에 정진하는 그의 한결같음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덧붙여 말 못할 고통에도 불구하고 연대 속에 사랑의 진정한 실천을 또한 한결같이 행한 그의 가족들 또한 존경스럽다. 단지 그가 처했던, 물리적/역사적 상황들이 -엘리트 대학생, 학생 운동, 통혁당 사건, 실천하는 지성 등등- 나와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이라 충분히 몰입할 수 없었던 어느 정도의 괴리감이 아쉬울 뿐. 

거창하게 사색까지는 아니라도, 멍이라도 유유자적 때릴 수 없을 만큼 요즘 우리는 게임에, 인터넷에, SNS에 혹은 그 무언가에 너무 많이 정신이 팔려있다. 잠깐이라도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혼자 조용히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책 접기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가 원숙이, 소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중략>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한편이 되어 백지 한 장이라도 맞들어보고 반대편이 되어 헐고 뜯고 싸워보지 않고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흡사 냄새를 만지려 하고 바람을 동이려 드는 헛된 노력입니다. 대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경우, 이 간격은 그냥 빈 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풍문 등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이것들은 다시 어안 렌즈가 되어 대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문이나 외형, 매스컴 등,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식은 '고의'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무지'보다는 못한 진실과 자아의 상실입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