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과 분노 - 개정판
윌리엄 포크너 지음, 정인섭 옮김 / 북피아(여강)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로드 짐 이후로 간만에 정말 읽기 힘든 강적을 만났다. 그래도 로드 짐은 참고 끝까지 읽길 잘 했단 생각이라도 들었지. 체감 가독 지수는 로드 짐보다 두 세배는 낮으면서도 다 읽고서도 왠지 살짝 배신감 드는 이 책. 운동으로 치자면 마치 마라톤 풀 코스를 뛴 듯 한 피로감이라고나 할까.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쉽게 몰입이 되지 않은 탓에 2부까지 읽는데 거의 한 달 이상 걸린 것 같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 장마다 다양한 인물의 시점으로 풀어나가는 서술 방식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백치 벤지의 시점으로 구성되는 1부 부터 오르막의 고비가 시작된다. 사건의 선/후가 뒤죽박죽인 서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다양한 등장 인물들, 게다가 중복되는 이름(제이슨,쿠엔틴, 벤지, 모리,벤자민...), 어디가 한 인물의 대사 끝이고 어디가 다른 인물의 대사 시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문장 처리와 부호의 생략들이 특별한 사건없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자살한 쿠엔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2부에선 번역의 미숙함이 문제인지 원문 자체가 그런건지, 의미 파악조차 힘든 장황한 문장들 때문에,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다행히 제이슨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3부와 작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4부는 훨씬 수월하게 읽히긴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남은 건 허무함과 배신감 비스무리한 감정 뿐이랄까.  

 

남부를 지리적 배경으로,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과 붕괴라는 소재를 하루-<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혹은 나흘-<음향과 분노>-이라는 지극히 짧은 제한적 시간의 틀 속에 가두고, 현미경을 들이대듯 확대 후 다양한 각도에서 세밀하게 해부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자잘하고 구질구질한 불행과 몰락을 직접 지켜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 특유의 개성있는 색깔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근친상간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쿠엔틴, 캐디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벤지, 공허한 답변 뿐인 무능한 아버지, 열등감과 허세 의식에 사로 잡힌 엄마, 상대적 박탈감과 책임감에 시달리는 제이슨, 이들을 지켜보는 딜시등 인물 개개인에 대한 입체적 탐구와 그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천착이 모자랐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이 인물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왜 인물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독자를 충분히 이해시키는데 부족했고 - 특히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혹은 저질렀다고 믿는 쿠엔틴과 캐디의 관계 설정-, 따라서 사건들 -뭐 쿠엔틴의 자살외엔 특별한 사건도 없긴 하지만-에 대한 개연성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런 아쉬운 점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강한 주제 의식이나 강렬한 스토리도 없었으니, 아쉽게도 작품이 갖는 이름값 만큼의 존재감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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