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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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에 대한 작가의 리포트쯤 되겠다. 교수님께 제출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불쑥 내민 리포트 말이다. 유치한 자기자랑도, 돈벌이도 아닐테고, 왜 이런 개인적 공부의 결과물을 공적인 출판물로까지 확대 했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부제까지 달고 말이다. 리포트를 내밀며 작가는 넌즈시 말하는 것 같다. " 내 책 읽고도 뭐 느끼는 바 없냐? 너거도 공부 좀 해라, 마흔 넘은 나도 가리늦게 공부했다. 너거는 젊지 않느냐, 뭘 좀 알아야, 젊은이들이 깨어 있을거 아니냐" 서문에서 언급했듯,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해,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공부했다는 그의 공부 동기는 뭔가 날카롭게 찌르는 구석이 있다. 씨바 뭐라도 알아야 편을 들든가, 욕을 하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최소한 입 다물고 있을 타이밍이란 걸 알 거 아닌가. 매체나 주위에서 어설프게 주워 담은, 남의 것이 아닌, 오롯한 나의 판단과 생각, 그것이 똥고집이든 바른 고집이든간에 끝까지 부려 볼 배짱이나 가질 것 아닌가 말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일단, 작가가 공부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 어쩌면 한 번 쯤은 궁금했을 주제들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읽어가며, 각 저자들의 논점을 인용, 비교, 분석, 비판 한다. 장정일 혹은, 독자(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동의하든 아니든간에, 이 책의 작가를 포함하여, 책속에 인용된 저자들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관점의 향연을 실컷 즐길 수가 있다. 읽는 간간이, 작가의 목소리가 한 톤을 유지하지 못하고, 삑사리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이 또한, 공부를 마친 자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과정에 있는 자라면, 자신만의 일관된 관점없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나 하고, 나름 너그러운 척 해 보기도 했다. 그럼 이 공부를 통해 저자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독일과 미국, 영국,중국,일본의 여러 역사적 상황들과 인물들, 한국의 근현대사와 박정희 조봉암등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 가다 보니, 결국 귀착점은 반 민족주의, 반 국가주의, 반 전제주의의 틀 속 어디 쯤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말이다.  

진정한 공부란 게 이런 거 아니겠나. a를 알고 싶어 a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모르는 b가 나오면 다시 b에 대한 책(자료)을 찾고, 다시c 와 d로 확장해 가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부의 즐거움 말이다. 왜 학교에서는 이런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 걸까? 정말 안타깝다. 대충 이름만 알고 넘어가도, 뭣 좀 아는 척 하는데, 혹은 전혀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도 없는 이런 문제들을 끝까지 파헤쳐,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의 열정과 근성,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의 기타 너그러운 여건들(?)이 마냥 부럽다. 여건 탓만 하지 말고 그 열정과 근성을 배우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자신이 별로 없다. ㅠ.ㅠ        

-덧붙임(2000.09.09)- 

책을 다 읽은 후에 이 책 만큼 자주 다시 들춰 보는 책도 없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후에 이런 저런 책들을 읽다 보니, 요즘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웬만한 분야는 이 책이 다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관련 분야가 다른 책에서 언급될 때마다 다시 찾아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고 작가의 사유가 잘 정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책의 완성도를 떠나, 책 제목 그대로 인문학 공부의 모범 전형을 작가 스스로 보여 주면서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의의가 있으며, 이 책이 어느새 내게는 일종의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되가고 있는 것 같다. 

* 책 접기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승리는 항상 상황을 운용하는 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원칙을 고수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을 이용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반면 패배에는 승리가 갖고 있지 않은 불변의 법칙이 있다." 

"모차르트의 성공이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모차르트를 억누르는 이중의 억압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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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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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 장에 쓰인, 무시무시한 (?) 경고문에 따라,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도, 교훈도, 플롯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헉 핀이 이끄는 대로, 몇 걸음 뒤에서 슬슬 따라가는 느낌으로 읽었다. 서른이 훌쩍 지나 다시 읽게 되었으니, 어린 시절 만화나 책에서 봤던 단순한 재미 이상의 그 무엇이 필시 있으리란 지나친 기대였나, 아님 자연스럽게도 헉핀이 아니라, 때때로 왓츤 아줌마나 샐리 아줌마의 눈으로, 요 꼬맹이의 세상과 어른을 향한 생존 투쟁기를 지켜 보고 있는, 내 잃어버린 동심이 문제였나. 기대와는 달리, 그닥 새로운 건 없었다.  

단순한 스릴과 재미 외에 이제 와서 좀 새로 보인게 있다면, 당시 미국의 분위기 정도랄까. 미시시피 강을 뗏목으로 이동하면서 헉과 짐이 마주치는 선하고 악하고, 때론 그 양면성을 모두 가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그들의 생활상, 헉핀의 혀를 내두를 만한 임기응변 -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살아 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습성 아니겠나 - 짐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부터의 순수한 목소리와, 짐을 고발해야 된다는, 프로그래밍 된 양심 사이의 어린 헉핀의 갈등 -역시 프로그래밍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지금 보면, 고민의 여지 없이 당연한 선택도, 그 시대정신의 강요와 의식화된 교육이 올바른 선택을 주저하게 하고, 오히려 죄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짐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 였건만, 짐의 탈출이 톰에게는 하나의 놀이였을 뿐. 천진난만하다고 해야할지 잔인하다고 해야할지 모를 난감함 정도랄까? -물론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겠지만-  

이상하게 최근에 읽은 소설의 모든 비극의 씨앗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잉태된다.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섹스하고, 귀저기값과 우유값을 대고, 학교를 보내고, 결혼을 시키는 것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기본 마저도 내팽개친 다양한 소설속의 아버지들과 현실속의 아버지들이 있지만.       

* 책 접기 

"늘 이런 식이었지요. 옳은 일을 하든 그른 일을 하든 매한가지였습니다. 인간의 양심이랑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을 탓할 뿐이었습니다. 만일 인간의 양심만큼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똥개가 있다면, 난 그놈을 잡아 독살해 버리고 말 겁니다. 양심이란 인간의 내장 모두가 차지하는 것보다도 더 큰 장소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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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셔우드 앤더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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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팔백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주의 와인즈버그라는 시골마을. 시대적 배경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산업화는 아직 시작되기 전 인 듯. 아이들 이야기도, 판타지도 없건만, 책을 덮었을 때, 이건 한 편의 아름다운 환상동화라는 생각을 했다. 왜, 그 티비속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 있지 않나. 모닥불 타오르고, 아이는 담요를 덮고 반쯤 졸고 있는데, 흔들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따뜻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뭐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이랄까?

크게 보면, 와인즈버그 이글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조지 윌러드라는 소년의 성장 소설쯤 되겠다. 각 에피소드마다, 조지 윌러드가 직/간접으로 연관되며, 각 에피소드 속 주인공의 그로테스크한 삶이 퀼트처럼 흥미롭고 아름답게 수놓인다. 그 하나 하나의 퀼트 조각들을 전부 엮으면, '이상하게 예민한 티끌같은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이불처럼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내면에서 들끓는 어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 또 달린다. 우리도 그럴때 가끔씩 있지 않나? 뭔지 모를 정체없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 서성이고, 무작정 미친듯 달리고 싶을때 말이다. 떠나지 못한 자들은 탈출을 꿈꾸고, 인생의 돌발 사건을 꿈꾸며 지루한 삶에서 탈출한 자들은 다시 와인즈버그로 돌아온다. 우리가 때로 그러듯, 그들도 인생의 막연한 허기증을 느낀다. 자신의 옹색한 삶속으로 아름다운 무엇인가 들어오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투쟁하고 좌절한다. 사랑받기 원하나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노작가의 말대로, 그들은 그것을 삶의 진실로 받아 들였고, 그 진실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려 했기 때문에, 결국 '그로테스크'가 되버린 것이다.   

조지 윌러드는 와인즈버그로 돌아올 것인가? 탈출에 성공할 것인가? 그의 쓰여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작품 속, 등장 하는 수많은 '손'들 -인간의 손부터 신의 손까지-과 함께 작가의 손이 다시 말하는 듯 하다. "나를 빨아서 다림질할 거야. 그래 날 빨아서 다림질하고 풀을 먹일거야."  그래서인가, 탈출에 성공한다에 한 표.   

여러 아름다운 에피소드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종이 알맹이들'에서 몇 줄 옮겨본다.    

"그는 여자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여자는 뒤틀린 사과의 달콤함을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먹는 둥글고 완벽한 사과에 다시는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다. -중략- 겨울 동안 그는 자신이 종이쪽지에 아무렇게나 써 놓았던 이런저런 갖가지 생각들을 모두 그 여자에게 읽어 주었다. 그것들을 읽어준 뒤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주머니에 넣었고 그것들은 둥글고 단단한 알맹이가 되었다." 

* 책 접기 

"강해지고 용기를 가져라. 그것이 길이다. 무엇이든 모험을 해라. 대담하게 사랑받을 수 있을 만큼 용감해 져라. 단지 남자나 여자가 되는 것 이상이 되어라. 탠디가 되어라." 

"네가 더 잘 준비될 때까지는 글 쓸 생각을 포기하는게 좋아. 지금은 살아야 할 때야. 난 너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난 네가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시키고 싶어. 넌 단지 말장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돼. 네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야."  

"당신은 사랑을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삶의 성스러운 돌발적 사고입니다. 당신이 사랑에 대해 분명해지고 확실해지고자 하면, 그리고 부드러운 저녁 바람이 부는 나무 아래서 살고자 하면,실망의 길고 무더운 날들이 재빨리 다가오고 지나가는 마차에서 불어오는 먼지들이 키스로 부드러워지고 열정적이 된 입술위로 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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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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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지배층은, 미디어와 제도교육을 통해, 내 생각이 결코 나만의 생각이 아니란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 자신을 그들의 '자발적 복종자'로 만든다. 우리는, 독서, 토론, 경험, 자기 성찰을 통해 이를 깨닫고, 물질이 아닌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관심과 무지에서 벗어나 자기성숙의 끊임없는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구지 정리하자면 이 정도일까?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별로 색다를 것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 생생한 실례, 개인적 체험 뭐 그런 말랑말랑한 구석이 별로 없는 직접적이고 건조한 논조? 작가의 명성에 비례한 지나친 기대감? 지금은 마이너이지만, 남들은 몰라도, 나만은 언젠가 메이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회색의 방어본능? '자발적 복종자'인 나를 보게하는 불편함?  

곰곰 생각해봤는데, 모두 다 인것 같다.      

*책 접기 

"우리에겐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이씨조선이 일제에 망하고 일제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한 결과로 거의 공짜로 얻은 게 우리의 민주공화국이다. 스스로 싸워서 획득하지 않은 제도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빈껍데기로 남기 쉽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화국을 군국주의 반대로 알고 있을 뿐 공화국의 어원이 '공적인 일'임을 알지 못하는 비대칭성이 낳은 것 중 하나가 공공성의 죽음이다."  

"직접 당하지 않으면 절대로 몰라요. 아니,당해도 절대 모를 거예요. 직접 싸워보지 않으면"  

"주위에 올곧음과 정직성의 청백이 있을 때 자신의 회색이 검정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군대에서난 학교사회에서나 청백한 사람들을 따돌린다."  

"지상의 꽃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데,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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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요원 대산세계문학총서 53
조셉 콘라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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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고 식상하긴 하지만, 왠지 참고서식 작품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치밀한 구성 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을 마음껏 즐긴 감상을 표현 하기엔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만 그렇게 느꼈나? 아님 인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원래 따뜻했었나? 등장 인물 모두 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밉지 않았다. 절대 선하다 할 수도 없고, 절대 악하다 할 수도 없는, 그래서 차갑게 몰아 세우기 애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이 허영심에 찬, 게으른 자들이란 것.       

벌록 - 대사관과 경찰 사이의 이중 스파이. 힘든 노동 대신 배신의 쉬운 삶을 선택한 이 남자의 게으름. 고용주에게 충성하고, 사회의 안정이라는 명분에 충성하고, 아내에게도 충성하며 살고 있다는 자기 만족의 허영심. 자신에 대한 아내의 애정의 성격이나 범위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둔함. 말도 안되는 부당한 임무긴 하지만, 해내지 못하면 이제껏 평화롭게 지켜왔던 자신의 삶의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 상황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고 지쳐하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인식이나 죄책감 없이 뻔뻔하게, 그것도 두 번 씩이나 밥을 처먹는, 나의 이해수준과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할 말을 꼴았다. 나같으면, 음식에 독 넣었다. 그렇게 배고프면, 실컷 먹고 죽으라고.         

위니 - 세상이란 너무 깊이 들여다 볼 가치가 없다는 철학적이고도 오만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체질적인 게으름과 무관심의 소유자. 동생에 대한 비정상적인 보호 본능으로, 사랑을 버리고 벌록을 택했다. 가족을 위한 희생에 대한 자기 만족의 허영심,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무서우리만치 침착하게 유지해 나가는 뻔뻔함. 그러나 미워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오시폰에게 매달릴 땐, 이 여자 끝까지 좀 태연침착하시지, 이렇게까지 무너지나 싶으면서도, 그녀가 느꼈을 그 엄청난 고통과 불안을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어쨌든, 이 작품 속에서 제일 불쌍한 인물이 아니겠나.    

스티비 - 고통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을 가진 퇴화 인간, 다른 존재의 고통을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무절제한 동정심과 순수하지만 무자비한 분노를 표출한다. 인간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나, 결국 누나와 엄마의 그릇된 주입으로, 벌록의 자동 인형이 되어,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갈갈이 찢겨진다. 광기와 허영의 인간들로부터 인간의 순수성은 결국 파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스티비의 결말을 통해, 작가는, '희망없음'을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일까? 

경찰 부국장 - 식민지 독립 운동을 필드(?)에서 탄압했던 시절이 적성에 맞았다고 생각하고 과거를 그리워 한다. 단지 귀부인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그러나 귀부인에 대한 그의 존경의 진정성은 있는 것 같긴 하다- 죄없는 미케일리스의 보호자(?) 역할을 결과적으로는 하게 되지만, 그 실제 이유는 숨긴채, 권력(국무장관)에 약삭 빠르게 접근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시폰 - 거만하고 악의에 찬, 행동가는 아니고 단지 선동가, 돈을 노리고 위니에게 접근 했다가, 결국 배신한다. 혁명주의자로서나, 남자로서나, 일관성있게 비열하다.   

교수 - 가난 때문에 자신의 능력 이하로, 사회의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그 자신,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약자를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며, 폭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기존 사회질서의 구조나 형태를 파괴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 모든것을 파괴시킨 후 마지막에 홀로 남은 강자가 되길 꿈꾸는, 자칭 파괴의 도덕적 대리인. 그가 느낀 열등감과 분노를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항상 몸 속에 폭약을 장치하고 살아갈 정도까지 절박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결국 그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를 행동에 옮길 것인가? 왠지 그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제일 매력적이었던 캐릭터였다.   

히트 반장 - 자칭, 무정부주의자들과 똑같은 기계에서 나온 생산품인 경찰. 교수가 기존 사회질서의 파괴자라면 그는 기존 사회질서의 수호자이다. 자기 일에 충실한 우직함의 이면에, 벌록의 정체를 알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권력에 대한 악의없는 허영심과 일반 시민위에 군림하려는 조야한 욕구를 보인다.   

전혀 근거도 없고 무시무시하며 몰상식한,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한 공격과 그 배후를 밝혀내는 과정이 주된 줄거리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스파이고, 그 주변에 혁명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경찰, 대사관 직원등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설 속 말 그대로,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건 '한 가정에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어떤 일의 근원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결코 캐묻는 법이 없다. 서로의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가족으로 동료로 같이 살고, 같이 일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한다. 각자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혹은 채우는데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 잔인한 비극뒤에, '게으름' 과 '허영심'이라는 인간 본성의 핵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산책에서 스티비를 잃어 버리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와도 된다 했을때, 벌록이 '왜?' 라고 한 번 만 물어보는 부지런을 좀 떨었더라면, 모자라는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일관했던, 스티비의 아버지만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웃기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또 웃긴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이런 인간 본성의 핵심을 들여다 본 후, 작가가 느낀 감정이 '수치'였을까? 스티브가 '수치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얼핏 '암흑의 핵심'의 커츠가 죽기전 'horror!'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원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shame!'정도가 아니었을까? 

쉽진 않지만, 허영심을 버리고, 좀 부지런해지자. 무언가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선 결코 게을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 책 접기 

"테러리스트와 경찰관은 같은 바구니에서 나오는 거라오. 혁명이든 법이든 똑같은 게임을 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것에 불과하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양쪽 다 게으름이오."  

"투쟁과 전쟁은 사유 재산의 조건이었다." 

"역사는 관념이 아니라 도구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모든것은 경제적인 조건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었다. 예술,철학,사랑,미덕 그리고 진실 그 자체까지도!"

"가장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혁명조차도 신념으로 위장한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준비되는 법이다."  

"삶이란게 뭣이냐 하면 온갖 것을 다 자체하고 심사숙고해야 하는, 아주 복잡하게 생겨먹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그래서 삶이란 이쪽 저쪽에서 공격받기 십상인 거요"

"어쩌면 가장 열렬한 혁명주의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영심을 달래고 욕구를 충족하고, 양심을 달래는 평화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을 자신의 개성보다도 더 실체적인 어떤 것과 동일시하고, 자만심을 어딘가에서 입증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자만심이 사회적인 위치에 있든, 아니면 해야만 하는 일의 질에 있든, 혹은 운이 좋게도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게으름에서 생기는 우월성에 있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뢰받는 조직원들의 깉은 충성심은 어느 정도, 애정이 담긴 경멸감과 관련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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