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요원 대산세계문학총서 53
조셉 콘라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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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고 식상하긴 하지만, 왠지 참고서식 작품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치밀한 구성 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을 마음껏 즐긴 감상을 표현 하기엔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만 그렇게 느꼈나? 아님 인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원래 따뜻했었나? 등장 인물 모두 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밉지 않았다. 절대 선하다 할 수도 없고, 절대 악하다 할 수도 없는, 그래서 차갑게 몰아 세우기 애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이 허영심에 찬, 게으른 자들이란 것.       

벌록 - 대사관과 경찰 사이의 이중 스파이. 힘든 노동 대신 배신의 쉬운 삶을 선택한 이 남자의 게으름. 고용주에게 충성하고, 사회의 안정이라는 명분에 충성하고, 아내에게도 충성하며 살고 있다는 자기 만족의 허영심. 자신에 대한 아내의 애정의 성격이나 범위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둔함. 말도 안되는 부당한 임무긴 하지만, 해내지 못하면 이제껏 평화롭게 지켜왔던 자신의 삶의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 상황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고 지쳐하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인식이나 죄책감 없이 뻔뻔하게, 그것도 두 번 씩이나 밥을 처먹는, 나의 이해수준과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할 말을 꼴았다. 나같으면, 음식에 독 넣었다. 그렇게 배고프면, 실컷 먹고 죽으라고.         

위니 - 세상이란 너무 깊이 들여다 볼 가치가 없다는 철학적이고도 오만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체질적인 게으름과 무관심의 소유자. 동생에 대한 비정상적인 보호 본능으로, 사랑을 버리고 벌록을 택했다. 가족을 위한 희생에 대한 자기 만족의 허영심,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무서우리만치 침착하게 유지해 나가는 뻔뻔함. 그러나 미워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오시폰에게 매달릴 땐, 이 여자 끝까지 좀 태연침착하시지, 이렇게까지 무너지나 싶으면서도, 그녀가 느꼈을 그 엄청난 고통과 불안을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어쨌든, 이 작품 속에서 제일 불쌍한 인물이 아니겠나.    

스티비 - 고통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을 가진 퇴화 인간, 다른 존재의 고통을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무절제한 동정심과 순수하지만 무자비한 분노를 표출한다. 인간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나, 결국 누나와 엄마의 그릇된 주입으로, 벌록의 자동 인형이 되어,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갈갈이 찢겨진다. 광기와 허영의 인간들로부터 인간의 순수성은 결국 파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스티비의 결말을 통해, 작가는, '희망없음'을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일까? 

경찰 부국장 - 식민지 독립 운동을 필드(?)에서 탄압했던 시절이 적성에 맞았다고 생각하고 과거를 그리워 한다. 단지 귀부인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그러나 귀부인에 대한 그의 존경의 진정성은 있는 것 같긴 하다- 죄없는 미케일리스의 보호자(?) 역할을 결과적으로는 하게 되지만, 그 실제 이유는 숨긴채, 권력(국무장관)에 약삭 빠르게 접근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시폰 - 거만하고 악의에 찬, 행동가는 아니고 단지 선동가, 돈을 노리고 위니에게 접근 했다가, 결국 배신한다. 혁명주의자로서나, 남자로서나, 일관성있게 비열하다.   

교수 - 가난 때문에 자신의 능력 이하로, 사회의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그 자신,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약자를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며, 폭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기존 사회질서의 구조나 형태를 파괴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 모든것을 파괴시킨 후 마지막에 홀로 남은 강자가 되길 꿈꾸는, 자칭 파괴의 도덕적 대리인. 그가 느낀 열등감과 분노를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항상 몸 속에 폭약을 장치하고 살아갈 정도까지 절박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결국 그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를 행동에 옮길 것인가? 왠지 그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제일 매력적이었던 캐릭터였다.   

히트 반장 - 자칭, 무정부주의자들과 똑같은 기계에서 나온 생산품인 경찰. 교수가 기존 사회질서의 파괴자라면 그는 기존 사회질서의 수호자이다. 자기 일에 충실한 우직함의 이면에, 벌록의 정체를 알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권력에 대한 악의없는 허영심과 일반 시민위에 군림하려는 조야한 욕구를 보인다.   

전혀 근거도 없고 무시무시하며 몰상식한,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한 공격과 그 배후를 밝혀내는 과정이 주된 줄거리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스파이고, 그 주변에 혁명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경찰, 대사관 직원등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설 속 말 그대로,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건 '한 가정에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어떤 일의 근원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결코 캐묻는 법이 없다. 서로의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가족으로 동료로 같이 살고, 같이 일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한다. 각자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혹은 채우는데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 잔인한 비극뒤에, '게으름' 과 '허영심'이라는 인간 본성의 핵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산책에서 스티비를 잃어 버리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와도 된다 했을때, 벌록이 '왜?' 라고 한 번 만 물어보는 부지런을 좀 떨었더라면, 모자라는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일관했던, 스티비의 아버지만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웃기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또 웃긴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이런 인간 본성의 핵심을 들여다 본 후, 작가가 느낀 감정이 '수치'였을까? 스티브가 '수치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얼핏 '암흑의 핵심'의 커츠가 죽기전 'horror!'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원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shame!'정도가 아니었을까? 

쉽진 않지만, 허영심을 버리고, 좀 부지런해지자. 무언가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선 결코 게을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 책 접기 

"테러리스트와 경찰관은 같은 바구니에서 나오는 거라오. 혁명이든 법이든 똑같은 게임을 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것에 불과하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양쪽 다 게으름이오."  

"투쟁과 전쟁은 사유 재산의 조건이었다." 

"역사는 관념이 아니라 도구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모든것은 경제적인 조건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었다. 예술,철학,사랑,미덕 그리고 진실 그 자체까지도!"

"가장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혁명조차도 신념으로 위장한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준비되는 법이다."  

"삶이란게 뭣이냐 하면 온갖 것을 다 자체하고 심사숙고해야 하는, 아주 복잡하게 생겨먹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그래서 삶이란 이쪽 저쪽에서 공격받기 십상인 거요"

"어쩌면 가장 열렬한 혁명주의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영심을 달래고 욕구를 충족하고, 양심을 달래는 평화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을 자신의 개성보다도 더 실체적인 어떤 것과 동일시하고, 자만심을 어딘가에서 입증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자만심이 사회적인 위치에 있든, 아니면 해야만 하는 일의 질에 있든, 혹은 운이 좋게도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게으름에서 생기는 우월성에 있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뢰받는 조직원들의 깉은 충성심은 어느 정도, 애정이 담긴 경멸감과 관련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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