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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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화려한 대사로 별 사건 없이 시종일관 극을 이끌어가는 김수현표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대사가 주가 되는 작품을 쓰겠다고 이미 빅토르의 입을 통해 밝히고는 있지만- 몇 군데 날카로운 부분도 있고, 중간 중간 생각을 하고 넘어가게 만드는, 화두 같은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말장난을 위한 말장난이란 느낌이 강했을 뿐. 깊은 울림은 없었다. '대중의 순진함을 치료'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이미 밝히고 시작한 서문부터, 사실 별로 맘에 안 들긴 했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 보다, 사랑, 나와 타자, 나의 본래성과 영원성,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등에 대한 작가의 두서없는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볼드 이탤릭체로 간다- 긴 독백에 가깝다. - 그것이 바로 메타픽션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등장 인물 고유의 목소리는 다 사라지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작가의 목소리만 남은 느낌. 자신의 피조물보다 더 튀고 싶은 것은 창조주의 당연한 권리일까? 

 

작품 전체에 흐르는 조롱과 침울한 농담은 물론, 그를 포함한 독자를 향한 것이겠지.   

 

*책 접기

 

"그러나 나는 정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용서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첫 번째가 사랑이고 아는 것은 나중 일이다.....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대상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보는 것! 어슴푸레함. 여기 안개 속에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사랑의 직감이 있다. 그 후에 완벽한 시선 속에 분명한 것이 온다."

 

"너는 물론 자신도 모르게 구체적으로 이 여자 저 여자가 아닌 추상적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지. 그때 에우헤니아를 발견하자 그 추상성이 구체화되어 일반적인 여성이 한 명의 구체적인 여성이 되었고, 너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거야. 이제 너는 그녀로부터 거의 모든 여자를 사랑하게 된거야. 즉 너는 여자라는 집단, 종 전체에 마음을 뺏긴 거지. 이제 너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종 전체로 옮겨간 거야. 말하자면 여자에서 한 여자로, 한 여자로부터 여러 여자들로 말이야."

 

"생생한 별빛만이 박혀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그 밤을 향유할 수 없는 가련한 나무들! 인간은 이곳에 이 나무들을 심으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너는 네가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을 잊어버리지 못하도록 전깃불로 야간 조명을 한 것이다... 잠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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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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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매력적인 소설. 특히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 엘리엇의 복합적인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1910~1930 년대 미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도 잘 전달. 그러나 꽤 긴 분량에 비해, 메시지 전달은 미흡 -특히 도식적인 래리의 여정- 좀 더 압축했더라면 좀 더 인상적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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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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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해서,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작품. 제대로 다시 읽고 느낀 점 두 가지.

 

1. 로버트 스티븐슨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 속에 어떤 브라우니 요정들이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깊이 있는 주제를, 이렇게 재밌고 스릴있게 다루어 내다니. 줄거리를 뻔히 알고 보는데도, 이렇게 재밌는데 모르고 읽었을 때는 얼마나 더 재미날까?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며, 지킬과 하이드라는, 영원히 살아남을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이 책에 실린 다른 두 단편 <시체도둑> 과 <오랄라>도 흡인력 있게 술술 읽히는데, 역시 양심, 도덕, 선과 악등을 다루고 있다. 번역이 잘 된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간단 명료하고 적확한 묘사도 꽤 인상적이다.

 

2.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지킬과 하이드의 모습과, 책 속에 그려진 모습이 실제로는 달랐다. <반쪼가리 자작>의 선한 자작과 악한 자작처럼, 그들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이분법적으로 갈라 놓은 존재가 아니었다. 처음엔 지킬의 의도대로, 하이드가 순수악의 결정체인 것 처럼 보였으나,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지킬과 하이드 모두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임이 드러났고, 그래서 이 작품은 더 풍성해지고 더 매력적이다.   

 

이는 서문 - 평범하고 은밀한 죄인들의 세계- 에, 잘 설명되어 있다 

 

" 지킬은 존경받을 행동과 비난받을 행동, 정의와 방탕, 사회적인 것과 관능적,성적인 것을 완전히 구분하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다.... 약품만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차이점들도 분명 뒤섞여 혼란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킬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자신도 선과 악이 혼재하는 복합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반면 하이드는 순수한 악의 인물이라 보았다. 그러나 하이드 역시 지킬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하이드가 순수한 악이라면 어떤 범죄의 의혹도 비웃을 수 있어야 하지만, 하이드는 여전히 자신을 신사로 보고 평판을 걱정하면서 지킬의 돈으로 사고를 무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킬은 유언장을 작성한다.....그는 비록 하이드로 살지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안락함과 특권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하이드가 지킬의 안위를 위한 단순한 알리바이며, 지킬과 분리되어 지킬에게는 무심한 순수한 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실험을 통해 자신이 탈출하고자 햇던 계급의 도덕 규범과 가치에 다시 매달리고 있다. 부르주아적 가치를 비판하면서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이 양면성은 사실 지킬이 원래 벗어나고자 했던 위선적 이중성을 지속하는 것이며, 그를 은밀한 죄악과 죄악에 대한 비난이란 연결망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다. 지킬은 결코 하이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이는 하이드 역시 결코 지킬과 지킬이 대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킬과 하이드의 재발견 !!! 

 

* 책 접기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내가 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지식이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혹자는 나를 뒤따를 것이고, 혹자는 나를 앞질러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감히 추측건대 인간은 결국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각기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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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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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에서 투르크 군의 대포에 맞아, 몸의 왼쪽이 몽땅 날라가버려, 말 그대로 반쪼가리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자작의 이야기다. 

 

끔찍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슬픈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있을 법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럴듯 하게 탈바꿈시키는 작가의 재주가 정말 대단하다. <나무위의 남작>에 이어 겨우 두 번 째 작품이지만, 이탈로 칼비노만큼, 남들과 차별되는 뚜렷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가 있을까 싶다. 박진영의 노래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개인 취향의 문제지만, 일단 노래를 들으면 '앗. 박진영이 만든 노래 아닌가?' 싶은 그런 것 말이다. 구지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은, 어렵지만 정말 멋진 일인 것 같다.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분리와 대결이라는 소재는 <지킬 앤 하이드>에서 이미 다뤘던 터라, 다소 식상했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슬프면서 아름다운 묘한 환상적 분위기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작품의 메시지도 좀 묻히는 듯 하다. 

 

예상과 달리, 문둥병 환자들과 위그노 교도들은, 악한 자작 못지 않게 선한 자작도 거부하는데, 이는 선과 악이 절대적 가치라기 보다,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로 결정되는 상대적 가치임을 잘 보여준다. 무분별한 절대 악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듯, 무분별한 절대 선도 인간에게 해롭다. '사악하면서도 선한 것이 결국 온전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 역시 중요한 건 균형이자, 단일성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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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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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결혼과, 양차 대전의 참전, 사냥을 즐겨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도 다니고, 낚시, 야구가 취미였던, 죽음의 방식 마저도 싸나이답게(?) 권총 자살이었던, 사토 도미오가 부러워 했다던, 상남자중의 상남자 헤밍웨이. 삼대에 걸친 자살, 라이프 지에 실렸던 그의 사진, 여하튼,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작가, 헤밍웨이. 하지만 정작 내게, 그의 작품은 <노인과 바다>가 처음이다. 생각 보다 작품 분량이 짧아서 놀랬고, 생각 보다 작품 해설이 너무 길어서 한 번 더 놀랬다.

 

줄거리를 말하자면, 단 한 줄로 요약 가능할 만큼 단순하다. 홀로 바다에 나간 노인이 사흘간의 사투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돌아오는 도중 상어떼의 습격을 수차례 받고, 집에 도착했을 땐, 그 크기를 짐작케 하는 앙상한 뼈대만 남았을 뿐.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건지. 뭔가 이유가 있긴 있겠지.

 

내 생각에, 이 소설의 미덕은 간결함에 있지 않나 싶다. 간결한 문체, 간결한 스토리, 간결한 배경, 간결한 등장인물. 너무 간결해서 심심하게도 느껴지지만, 그 간결함에 대비되어 메시지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며 누구나 늙는다. 그래서 노인은 실제로 어부의 삶의 터전이자, 인간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바다로, 혼자 나간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혼자 청새치와 사투를 벌여야 할 때,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상처난 손과 팔로 오직 싸움을 위해, 다랑어와 날치의 살을 씹을 때, 그게 나라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심정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와 외로움이 엄습할 것 같다. 그러나 노인은 청새치와의 둘만의 고독한 레이스를 꿋꿋하게 펼친다. 

 

여기서 내 해석은, 청새치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젊은날의 노인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고 실제로 싸움 대결에서도 챔피었이었던 젊은 날의 노인처럼, 청새치는 크고 강하고 훌륭하고 위엄있다. 노인은 그런 청새치를 잡음으로써, 그의 젊음을 다시 한 번 포획하고, 잃어버린 자부심을 회복하여 새로운 희망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인은 사자꿈을 자주 꾸는데, 권력과 힘의 상징인 사자처럼 되고 싶은 그의 무의식을 투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화라는 자연의 법칙 (상어떼)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지 않고, 결국 뼈대만 남은 고기 - 마치 지금의 노인처럼- 와 함께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지치고 상처입은 노인 -기성세대-과 그를 위로하고 돌봐주는 소년 -젊은 세대- 사이의 교감과 우정은, 비록 젊은 시절 - 나아가 풍요롭고 화려했던 시절- 로 돌아갈 수 없어도,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며, 인간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런지.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자면, 노인의 행동은 어리석다. 능력이 안 되면 잡지를 말든가, 아니면 좀 현명하게 일부는 포기하고 일부라도 건져서 돌아오던가. 하자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노인의 고군분투가, 흔히 해석되듯,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와 닿았다기 보다, 승산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동질감과 연민 때문에, 소년이 상처와 피곤에 곯아 떨어진 노인을 두고 커피를 구하러 내려 오면서 엉엉 울때 나도 같이 잠시 울컥했다. 나였더라도, 어부의 피가 흐르고, 자신의 강함에 대한 자존심이 아직은 살아 있는 노인이었다면, 청새치와의 싸움도, 상어떼와의 싸움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테니까. 설사 다치고, 지치고, 남은 것은 뼈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왜? 그건 어부로서의 내 능력에 대한 자존심이니까.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부로서의 자존심, 자신의 강함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노인에게는 패배나 마찬가지였을까? 

인간은 패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파멸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요즈음,

패배, 그 머시라꼬.. 그기 그리 힘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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