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오래되어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버리는 시대에 버림받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래되어 변화가 불가피한 삶의 현장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살아 숨쉬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가졌었던 고운 마음들도 모두. 잠시 멈춰서서 문득 앞,뒤,옆을 바라보게 된다.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하고.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을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하늘이 굉장하네요
네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별이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고
....무재 씨,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도시일까요?
하며 무재 씨가 웃었다
아무튼 이런 광경은 인간하고는 너무도 먼 듯해서,
위로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