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도 알아. 그런 날이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처음부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져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 모든 일이 하나도 수습되지 않을
듯한 날이 있다는 걸 말이야.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거나 사기꾼,
적어도 남의 이익을 부당하게 취하려는 나쁜 사람들 같고
유리창 너머 저쪽에는 행복의 나라가 있는데
나 혼자만 유리창 밖에서 모든 찬 바람이란 바람은
다 맞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날.
이런 날은 꿀바나나를 먹어보자. 이런 날은 몸이 지쳐서
빨리 당분을 섭취하고 싶어지니까.
준비물은 바나나, 버터, 꿀, 그리고 계핏가루 약간.
중요한 것은 맛을 느끼며 천천히 먹는 거야. 천천히 그것을
먹고 나면 우리 유전자는 실은 약간 행복해한단다.
천천히 먹지 않으면 유전자가 단맛을 마약처럼 탐닉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천천히 즐기며 먹는다면 뇌도 기뻐할거야.
먹으면서 엄마의 말을 들어보지 않겠니?
데이비드 리코는 자신의 책 <사랑이 두려움을 만날 때>에서
이런 말을 했어.
˝어른이 된 우리에게는 이제 두 가지 임무가 있다. 곧, 가는
것과 되는 것(to go and to be)이다. 성숙을 위한 첫 번째
임무는 도전, 공포, 위험 그리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는
것이다. 두 번째 임무는 그것에 대해 인정을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 단호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인정은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 나의 투사(projection)가 함께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딸, 꿀바나나는 설거지도 쉽지? 뽀독뽀독 씻은
그릇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오늘 밤은 책이라도 한 권 펴보자.
가을이 깊어간다.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 있을지,
네게 얼마나 많은 날들니 남아 있을지 우리는 사실 모른다.
이 순간을 우물우물 보내면 인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거.
오늘 밤을 잊지 못할 밤으로 만들어보지 않겠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는 조용히 꿀바나나를 먹었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을밤이었다.
이런 일기를 쓸 수 있는 그런 밤으로.
꿀바나나는 상상 이상으로 괜찮음! 맛있었다. ^^
그리고 엄마와의 카톡!
˝엄마, 나 키울 때 어땠어?˝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애낳은거마냥 행복해했었어.˝
˝고마워 잘자. ^ ^˝
엄마는 늘 안좋았던 일은 금방 잊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 엄마의 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것..
인정을 받건 그렇지 못하건 단호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그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