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수요 부족이 불황의 원인이란다. 해결책도 있다.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지원. 그런데 이 간단한 걸 왜 못하고 있을까.

최근 국민은행 ‘귀족‘노조의 파업과 최저임금인상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의미심장했다. 전자에 대한 시선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좀 의아했다. 후자의 경우 (속도의 문제는 종종 지적되었지만)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윤리적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전자는 부자가 더 가지려는 탐욕으로 이해된다. 평균임금 91백만원이라는 사실이 이 점을 더 부채질한다.

현정부의 경제정책은 임금 인상(소득주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 이 용어를 고수하는지는 알겠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괜한 시비거리를 만들고 있어 임금주도성장으로 바꾸는게 나을성 싶다)을 통한 내수진작 즉 유효수요를 늘리려는 것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민은행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는 장려되어야 마땅할 사건이다(양극화는 이들 사이의 부의 격차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이때 진짜 양극화의 주체는 교묘히 감추어진다).

기업의 성과가 가계로 적절히 흘러들어야 한다는 게 임금주도성장의 기본이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부자는 법인 즉 기업이며 빈자는 가계 즉 개인이다. 기업의 이익은 개인으로 흘러들어가야 한다. 최저임금인상이나 귀족노조 파업이나 모두 이런 목적에 부합하는 정책이고 행동이다.

폴크루그먼이 말미에 ˝문제는 아이디어다˝라는 케인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제는 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별 사안에 대해 즉각적으로 분열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기묘한 모순을 반영한다. 자신의 집단에 반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를 말이다.

경제공부를 재테크의 영역으로 물들이는 것은 고도의 전략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세력이 이 분야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 점잖은 척 돈에 대한 이야기를 터부시하던 관습은 유통기간이 만료되었다. 호수적 교환에 근거한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과 바깥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를 변혁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모두 깨어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할 때라야 우리는 정말 다른 이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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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환경의 믹스매치. 개그의 기본이랄까. 그런 점에서 보면 매우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여자 사람이 축구가 좋아서 할아버지들과 축구시합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기본을 한다. (근데 이때 서로에 대한 ‘공식‘ 호칭이 아부지, 딸 이라니 으엑 많이 징그럽다. 나도 개인주의자라서인가?)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고양이를 사랑해서 결국 콧물눈물 흘리며 고양이를 키우는 이야기처럼 ‘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걸해야 하나‘라는 심정이 베어있는 점이 좋다. 좋아하는 것에 싫어하는 것이 섞여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 결국 인생에서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난처하면서 기분좋기도 한 것이, 비닐장갑을 끼고 고양이 등을 쓰다듬는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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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라캉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조금이나마 알아들으려면 국내에서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 되는데 이 책이 그 중 하나다.

리더는 조금 소프트한 버전으로 대중서라고 보여지는 다른 책들을 많이 썼는데 그것들은 썩 좋지는 않았다. 번역이 이상했거나 저자가 이상했거나 인데 이 책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을까 싶을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조금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프로이트를 경유해 들어간 세계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프랑스 버전 처럼 심란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순과 불합리함이 넘실대는 인간 심리를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항해한 선박의 탐험기록처럼 신뢰감 있게 읽히기도 한다.

라캉에게서 혹은 리더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면 ˝정신병을 촉발시키지 않는 망상˝에 관한 관심일 것이다. 비유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가치체계)가 소프트웨어로서 안정적으로 설치 운영되려면 (부성은유와 같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되어 오작동할때 운영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비상체제로서 ‘망상‘이 구멍난 부분을 메운다는 것이다.

즉 정신병은 구조적 문제이며 이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목표는 구조적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재건축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게 꼭 정신병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언어는 대체로 논리적이지만 군데군데 매우 비논리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런 구조 자체가 일반적인 마음의 구조적 형태가 아닐까. 그게 꼭 ˝나는 신의 아들이다˝와 같은 극단적인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강단역사학은 모두 일제식민사관의 노예이며 재야사학만이 진리다˝와 같은 믿음을 고수하는 모습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불안정하다는 의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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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22-06-1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을 꼽으실 것 같군요:(
 

소크라테스를 다루는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변증법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야 하는 과학적 사실의 발견에 있어서는 별 쓸모가 없는 방법론, 이라는 게 러셀 경의 결론인데 선뜻 이해가 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천동설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탐구하여 지동설의 가능성을 도출해낸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새로운 사실의 발견 자체가 과학적 관찰에 의존한다손 쳐도 관찰의 필요성을 상기하기 위해서는 기존 체계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의 성과인 과학적 발견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과정으로서 합리성을 따져묻는 토론이 뒤따르는 게 당연해보인다.

철학, 요즘말로 치면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흥부와 제비가 물어다 준 박처럼 분명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지만 박 속에 든 보물이 흥부가 피땀 흘려 쟁취한 소유물이라기보다 ‘이벤트성 경품‘에 가깝듯 전적으로 응원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과학적 성과가 철학의 영역에 어떤 종류의 유익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흥부가 보물을 다시 얻어보겠다고 다리 부러진 제비만 찾아다니는 게 이 이야기의 후속편이 아니듯 첨단과학으로 철학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철학은 오히려 언어 게임에 가까우며 언어 게임을 둘러싼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 탓에, 다시 말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직접 볼 수 없는 탓에 외부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데 그 심판 역할을 과학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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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빈곤‘보다 ‘풍요가 만든 빈곤‘이 맞는 말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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