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세요 타세요
홍진숙 지음, 강근영 그림 / 여우고개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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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배기 작은 아들이 올 가을 할아버지 댁에 가면서 기차를 탔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쯤 말 배우기 한창이어서 터널에 들어가면 `터널`, `깜깜해`, 밖으로 나오면 `환해`라고 말해주니 곧 따라 말했다.
이틀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와 첫째 어릴 적에 읽어주던 이 책이 생각나 다시 펼쳐들었다.
이 책에서도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는 그림이 나오는데 거기엔 ˝굴이다˝라고 적혀있다. 아차차,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입에 익숙한 말을 너무 쉽게 뱉었구나 싶었다. 예쁜 우리말을 두고 터널이라는 말을 가르치다니...
아이가 장난감 기차를 엄청 좋아해서 이 책도 정말 좋아하고 여러 번 읽어주었다. 이제 아이는 터널보다는 굴이 더 익숙하겠지.
크레용으로 알록달록 색칠한 그림이 사랑스러운 책이다. 구겨지고 낙서도 있지만(첫째가 18개월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시골에 내려갈 때 가져갔는데 누군가 아이 책에 볼펜으로 몇 글자 적어놓았다) 우리 두 아이 모두 즐겁게 본 책이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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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양장) - 아기 그림책
정순희 지음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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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어릴 적에 동원 책꾸러기에서 받은 책이다. 까꿍놀이가 시시해질 무렵에 받은 책이라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는 무척 사랑스럽게 느꼈다.
한땀 한땀 바느질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을까. 그래도 정순희 님은 참 행복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줄 생각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내게도 이런 솜씨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정도로 곱고 예쁘다.
둘째 아이가 아직 까꿍놀이를 하는 요즘 이 책이 지닌 재미와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낀다. 말을 배우느라 한창 옹알옹알 하는데 책에 나오는 동물 이름도 따라하고 동물이 숨은 곳도 잘 따라 말한다.
까꿍놀이 그림책이 대개 그러하듯 이 책도 마지막에 아기가 나온다. 우리 아기도 형아랑 뒹굴며 놀 때면 까르르 웃으며 가장 즐거워하는데 책에도 언니랑 노는 아기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을 보아도 처음 보는 것 마냥 까꿍!을 외치고 즐거워하니 여러 번 읽어주는 나도 고되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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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12-0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서로 뒹굴며 놀 적에
참으로 맑게 웃어요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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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쓴 글을 여기저기서 떼어다 짜깁기한 책.
작가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궁금하면 맛보기로 기볍게 읽어볼 만은 하겠지만 이런 책은 그냥 공짜로 나눠줘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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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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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화석화된 학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드라마입니다. 인간과 사건이 살아있는 역사는 읽기의 재미를 넘어 같은 상황이 도래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묻게 합니다." - 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니 자연스레 지금의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윤휴가 있고, 윤휴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제거하려 정치공작을 폈던 서인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또다른 서인이 있다.


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백성들을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 쯤으로 여겼던 사대부와 같은 기득권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도 여전히 존재한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법안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법안 만들기에 혈안이다. 권리는 누리고 있으면서 병역 기피에 누구보다 앞장 서 있다는 것도 지난 300여 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인사 청문회에 나선 이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하나같은지 한숨만 푹푹 나온다.

역사학자 이덕일님 신간이다. 저자의 유명세에 비해 윤휴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침묵의 제국이라니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면 어느 나라겠는가. 도대체 윤휴가 누구이기에 그의 이름에 '침묵'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따라 붙었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여기에는 윤휴 못지 않게 송시열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의 다른 책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언제고 읽어보려 마음 먹었었는데 윤휴는, 노론의 수장이었으며 송자로까지 불리며 시대의 추앙을 받았던 송시열이라는 인물과는 반대 정파인 남인으로서 모든 면에서 송시열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운다.

국사 교과서에 북벌과 함께 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송시열인데 그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북벌을 외쳤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북벌을 대의로 내세운 윤휴가 등장하자 송시열을 수장으로 한 서인(노론)들은 당황할 수밖에.

윤휴과 송시열의 평생에 걸친 싸움은 나라 안팎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의 충돌(70쪽)이었다. 나라 밖으로는 청나라의 운명을 뒤바꿀만한 대란이 발생한 때였다. 복명을 기치로 내걸고 삼번의 난이 일어난 것. 나라 안으로는 각종 폐단으로 백성들이 신음하던 때였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소빙하기와 맞물려 흉년이 들어 곳곳에 도적과 유민이 창궐하고 있었다. .

윤휴는 이 시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북벌과 민생폐단 해소를 위한 지패법과 호포법 실시를 주장했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다른 기존의 호패법 대신 신분의 구분 없이 같은 재질의 종이로 호적을 기재한 것이 지패법이었다. 그러나 지패법은 반상의 구분이 없다는 이유로 사대부, 특히 조정의 서인 계열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 

호포 [戶布 ]은 양반 사대부들의 군포 납부가 면제되었던 것을 없애고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호가 군포를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먹고 살 걱정 없는 양반이 오히려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 부담을 이중 삼중으로 백성들이 지고 있었다. 윤휴는 지패법과 호포법을 동시에 실시하면 백성들의 질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서인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두 제도를 실시하면 백성들의 민심이 사나워질 것이라 반박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들의 민심이었다.윤휴는 스스로를 평민이라 낮추었고, 실제로 만 58세의 늦은 나이로 출사하기 전까지는 포의지사로 살면서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목격했다. 그렇기에 그가 시종일관 주장했던 제도들은 사대부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실질적으로 덜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서인들은 윤휴가 '진짜 북벌'을 들고 나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북벌은 자국 임금을 내쫓는 쿠데타용이나 자국 정권 장악을 위한 국내 정치용 슬로건(142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회복 또는 유지에 급급했던 서인들과 청나라 눈치 보기에 바빴던 숙종은 결국 윤휴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온갖 정치공작을 펴 윤휴 죽이기에 혈안이 된 서인들의 속마음을 숙종이 몰랐을 리 없고, 윤휴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정치공작이라는 사실 또한 몰랐을 리 없을 테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학습했던 숙종은 서인들의 쿠데타로 왕위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서문_9쪽)는  아기장수설화 [─將帥說話 ]의 맥락과 비슷하다.  윤휴는 비록 아기장수처럼 평민 출신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여느 사대부와 달리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줄 아는 선비였다. 백성들은 윤휴가 세제의 개혁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가져다 줄 인물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윤휴가 형신(추국장에서 곤장 30대를 치는 것)을 몇 차례나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동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양쪽 길가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죄목을 만들어 일단 죽이고 보자고 정치공작을 폈던 서인(노론)들은 그런 정치공작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집권했으며 게다가 멸망 뒤에는 일제에 가담하기까지 한다. 지금도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서 윤휴의 이름 대신 송시열을 올려놓고 윤휴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덕일을 통해 재조명된,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윤휴를 지금에라도 만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제 우리는 긴 침묵을 깨야 하고 시대의 금기를 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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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각 창비청소년문학 37
황선미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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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임에도 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서다. 그 모습이란 단지 철없고 미성숙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치유되지 않은 내 안의 상처로 치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아직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성인은 정말 많다. 하지만 그 상처를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써 그것을 덮으려고 하다 그것이 상처였는지조차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성장소설을 읽노라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그때 나는 어떤 식으로 나 자신을 방어해왔는지도 떠오른다. (물론 그때 당시는 그것이 방어였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을 어른이 된 지금 되돌아아보건대 후회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인물이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그때 왜 이렇게 하지 못했나'라고 후회하기보다는 내 아이가 그때의 나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내가 했던 것보다 더 건강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선미는 최근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이다. 아동문학계에서 이미 유명한 황선미 작가이건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내용을 마치 직접 읽은 것처럼 제법 자세히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황선미라는 작가와 이 작품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회사 중역인 아빠, 조각같은 외모로도 모자라 성적도 최상위권인 오빠, 그리고 아들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서슴지 않는 엄마, 그리고 이들로부터 어떤 관심도 갖지 못하는 우리의 주인공 유라. 아, 너무도 뻔한 가족 구성원이지 않은가. 이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20세기 청소년소설 냄새를 풍기는데 게다가 출생의 비밀, 성폭행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어느 쪽이 더 건강한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분명 있다.

 

멍청한 자식. 재희랑 논 애가 얼마나 많은데. 그 앨 여친이라고 자기 아킬레스건까지 텋어놓은 건 상연이 실수였어. (176쪽)

 

재희가 상연이와 나눈 비밀을 못 지킨 것은 손가락질 당할 만하다 쳐도 그렇다고 해서 한번 놀았던 애 두 번이라고 못 놀까 하는 심정으로 몹쓸 짓을 저지른다는 게 합리화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경준은 집안의 배경을 버팀목 삼아 사건의 진실을 흐리려했던 자신의 부모와 한치도 다름이 없다. 최상위 성적권의 학생들이 연루된 성폭행 사건이 해결된 방식은 어른 세계의 복사판이다. 그 사건을 수습한 것이 가해자들의 부모인 '어른'이기 때문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진짜 가해자의 실명이 피해자에 의해 직접 밝혀진다. 가해 학생 중 누구는 자퇴하고, 누구는 해외유학을 떠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이 학교에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잘 마무리지은 듯 보인다. 하지만 돈 많은 범법자들이 구렁이 담넘듯 특별사면을 받아 내듯 그들은 언제가 당당하게, 또 화려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그후 피해 여학생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해 학생의 처벌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피해자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핵심 사건을 대면하고 풀어나가는 모습은 보여주지만(주인공이니까 당연하겠지만서도) 피해자가 주인공은 아니었을지언정 성폭행 사건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이지 않은가.

전작의 아우라가 너무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은 황선미 작가에 대한 기대가 큰 나머지 실망도 큰 작품이다. 사건들은 묵직했지만 소설책은 얇았다. 다각도에서 깊이를 조금 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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