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어제는 비가 왔었지.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아. 가을, 잎을 모조리 버리는 나무를 보면서, 나무가 올 한 해 길러왔던 잎들을 버려야하는 나무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아직은 쌀살한 봄에 기지개를 펴고 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잎들을 버리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



나무에게는 그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 어떤 감정을 담기가 어려웠을 거야.



그것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회사를 나가야 하는 우리의 쳇바퀴와는 다르지.
우리의 쳇바퀴가 인위적인 것이라면 나무가 한 해를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적인 것이니까.



<장자, 그 선의 물결>은 장자의 내편을 감산덕청 스님의 주석과 함께 역자의 해설이 한 번 더 들어있어서 장자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야.



장자는 우화를 즐겨 썼는데, 그 유명한 장자의 꿈. 내가 나비인지 혹은 장자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또 나무와 관련된 우화도 몇 개 있어.



유용성이 없는 나무라고 홀대하는 사람에게 그 나무가 발끈, 하는 장면이 있거든.



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이분법으로 나누겠어.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도 그렇고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지.



내가 언제부터인가 나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인지, 생물학적인 탄생 말고 ‘나‘라는 인식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또 내가 죽고 나서 ‘나‘라는 인식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



없음에서 내가 탄생했듯이, 내 형태도 언젠가는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렇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형태를 억지로 버리거나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는 건 아니야.
자연스러움, 스스로 그러함에 맞추어 살아야지.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잘 산다는 것이니까.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그대는 큰 나무를 가지고서 그것이 어떤 쓰임도 없다고 걱정하는가. 어찌하여 어떠한 있음에도 없는 고향인 광막한 들에 큰 나무를 심고 그 곁에서 함 없이 방황하고 그 아래에 누워 자면서 소요하지 않는가! 도끼에 찍혀 요절하지도 않고 사물이 해치지도 않는다. 쓸 만한 곳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괴로워 할 것인가?"



"태어남을 기뻐하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타향으로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소?
꿈에서 술을 먹은 자가 아침에는 곡을 하며 운다오. 꿈에서 곡을 하며 울었던 자가 아침에는 사냥을 나간다오. 그가 꿈꾸고 있을 때는 그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오. 꿈꾸는 가운데 또 그 꿈을 점치기도 한다오. 깨어난 뒤에야 그가 꿈꾸었음을 안다오. 또한 큰 깨어남이 있은 뒤에야 그것이 큰 꿈이었음을 안다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깨어 있어 명백하게 안다고 여긴다오.
임금이니, 목동이니, 고루한 공구도 당신과 함께 모두 꿈을 꾸고 있소. 내가 그대는 꿈꾸고 있다고 일컫는 것 역시 꿈이오. 이러한 꿈 이야기를 ‘지극한 괴이함‘이라 한다오. 만세 뒤에라도 이 이야기의 의미를 아는 큰 성인을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우연히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행운이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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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쌀쌀한 공기가 뺨을 스칠 때, 당신에게 권태가 가득하다면.



<외로운 남자>는 그야말로 권태로 가득찬 책인데, 이 책을 읽었을 때 멍한 느낌이 들었어. 
이 책은 첫 문장에서부터 확 막히는데, ˝나이 서른다섯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로 시작해. 
큰 줄거리로 진행되는 책은 아니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이야. 



어느 날 갑자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남자는 다니던 장을 그만두고 더 좋은 건물로 이사를 가서는 권태에 빠지게 돼.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으면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찾아다니면서 먹고,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이 남자는 뭐지? 아니 막말로 생각해 봐. 월세 500씩 통장에 매달 들어온다고 하면 아무 걱정 없이 좋을 것 같잖아. 아니면 갑자기 로또가 당첨되어서 30억이 생긴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말야, 축복이 아닐까 싶어.



권태에 가득찬 삶.



11월이 되었으니 하는 말인데, 정말 올해는 권태에 가득찼었어.
게임, 책, 드라마,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잠자기.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어.



권태, 우울,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한 번 생각한 것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밤새 편히 잠을 못 들게 만들어.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가 일에서 벗어나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순간에 권태는 빈틈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 아닐까.
주인공 옆에 누군가 있었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야.
외로움이라는 것, 권태라는 것은 누군가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인생이란 혼자서 걸어가는 산책로잖아.



나는 가끔 무척 두려워.
죽음이란 사실을 외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으로 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죽음을 동력으로 내가 하루를 얻은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의 죽음 역시도 누군가의 동력이 될 수 있겠지.
내가 죽어도 이 세계는 변함이 없겠지만
나의 세계, 나의 우주는 내가 죽으면서 사라질거야.




노력과 권태 중에서 내가 항상 선택하고 선호한 것은 어떤 종류의 권태였다.

권태는 마비를 유발하고, 파괴적 행위만 하게 하거나 죽음과 비슷한 상태에 몰아넣는다. 견딜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었고, 나는 아무 것에도 매달릴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을 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 죽을 지경이었다. 마치 공기 속에서 익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이의 고민, 수십억 인류의 고민과 두려움을 몽땅 짊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나 자포자기, 아니면 무의식적 자포자기에 빠져 청소년기를 거치고, 성인이 되고, 늙어버린다. 즉 각자는 유일하며, 동시에 모든 인류에 속하며, 곧 전 인류적 존재이다. 고민, 절망, 공포가 수십억 인류에 공평히 분배되었다면 훨씬 편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은 모든 인류의 고통의 수십억 분의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한 개인의 죽음이 우주 전체의 붕괴를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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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 소개할 책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인데,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지?
영화로도 제작된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 (사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본 적은 없어)



첫 장면은 뉴올리언스 시의 ‘극락‘이라는 거리에서 <블루 피아노>라는 노래와 함께 시작하지.
블랑시는 여동생 스텔라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글쎄 과연 블랑시는 이곳에서 ‘극락‘을 찾을 수 있을까? 



블랑시는 고향을 잃어버리고 스텔라 집으로 온 거야. 사랑했던 사람이 죽으면서 자신의 일부 혹은 전체를 블랑시는 잃게 되었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블랑시 행동의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블랑시는 고향에서 꽤나 유명한 여자가 되었거든. 교사라는 직업을 잃을 정도로.



그렇지만 블랑시의 마음에는 아직도 허영이 남아 있어.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싶어하는 욕망도 있지. 이런 블랑시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이 모습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데 말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간다면 최종 목적지는 극락일까, 지옥일까?

(블랑시)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린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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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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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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