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한강의 책들은 "여수의 사랑", "채식주의자", "노랑무늬영원" 이렇게 세 권이다. 그리고 이번에 친애하는 벗인 곰곰발님에게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집을 선물로 받아서 첫머리에 실린 '어느 날 그는'이라는 단편을 읽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강의 특장特長은 사물을 수려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는 구체적 표현력과, 작가 특유의 따뜻한 감성을 실어 나르는 서정적 문체이다. 한강은 서사를 분절하거나, 문장의 추상적/철학적 색채를 높이려는 (이른바) 실험적인 모습보다는 일상의 세목을 능숙하게 엮어서, 작가의 서정적 세계관을 최대한 감도 높게 보여주려는 (비교적) 전통적 작법에 충실한 편이다.
'어느 날 그는'은 범박하게 말해서 이렇다 할 자본도, '빽'도 없는 도시의 가난한 직장인 남녀들의 사랑과 파탄을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한강의 강점이 드러나는 대목은 도입부로, 더위와 매연과 소음으로 찌든 도시의 고시촌 일대를 형상화한 부분이다. 한강은 주인공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장기인 고도의 묘사력을 발휘해 그가 고독하고 불우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찬찬한 필치로 보여준다. 그다지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생동감과 사실감을 확보하려는, 작가 특유의 정직한 성실성은 바로 이런 데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서적 배달부(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지금 딱히 생각나지는 않는다)인 남자와 출판사 직원인 여자가 불화와 갈등을 겪고는 비극적 결별(남자는 여자에게 칼로 자상을 입힌다)에 이르는 중후반부의 상황은 어딘가 조리가 맞지 않는, 작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삶의 세목을 그리는 데 충직했던 한강의 문장은 여기에 이르러 작가의 낭만적/관념적 인식을, 충분한 서사적 맥락 없이 반영하려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만다. 예컨대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러했듯이, 한강은 작중 주인공이 채식적 삶을 지향하게 되는 서사적 동인과 상황을 그다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한다. 작가는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원인을 집요하게 붙들고 탐색하기보다는 착시(꿈, 상상 등)에 기반한 환상적 이미지를 양산하고, 작중 인물의 감상적 독백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나열하는 수법을 취한다. 그 결과 작중에서 애상과 허무의 정조는 도드라지지만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개연성과 신뢰성은 옅어지게 된다.
독자는 독서의 쾌감과 감동을 아직은 불완전하게 느끼는 중인데, 한강의 소설 속 어느 인물은 일찍부터 눈물을 흘리고, 어느 인물은 광기에 젖어서 칼을 휘둘러 애인에게 상해를 입힌다.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게 될 때, 작가의 소설에서 부쩍 늘어나는 것은 작위적 상황 설정과 과잉된 이미지들, '세상은 어두워', '우리는 연약해'와 같은 류의 진부한 독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