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을 위해서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잔가지를 과감히 쳐내야 한다. 단순화시켜야 한다.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파괴시켜야 한다. 나는 단순한 역할을 통해서 역사적인 변화에 일조할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세상은 획일화 된다. 원거리 통신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아파트 내부는 편리한 기구들로 나날이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 

- 미셸 우엘벡의 투쟁 영역의 확장 중 21쪽에서 -

 

 

 

  

 

 

 

 

 

 

 

 

 

 

 

 

 

 

특별한 계획없이 시작한 새해도 벌써 열흘이 넘게 흘렀다. 1월은 겨울방학기간이라서 괜시리 마음만 분주하다. 대충 친구를 만나서 먹거나 떼워도 되는 점심을 꼬박 꼬박 챙겨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있는 방학이기 때문이다. 한파를 예고하는 일기예보처럼 매서운 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름은 더워야 하고,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지만 이 겨울 바람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본래 추위보다 더위에 더 민감하고 약한 체질이었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이제는 추위에 더 예민해졌다. 토요일 저녁부터 미셸 우엘벡의 투쟁 영역의 확장을 읽기 시작했다.

번역된 우엘벡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투쟁 영역의 확장을 읽기로 했다. 이유는 만만해 보이는 책 두께와 소립자의 전작 쯤으로 소개되어

있는 리뷰를 보고 선택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이라는 제목조차 전투적이고 도전적이다. 투쟁이라함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과정을 일컫는데 내 삶에서 치열한 투쟁이있었던가 ?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치열한 과정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투쟁을 해서 얻어낼 만큼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담배를 점점 더 많이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적어도 하루에 네 갑은 피우는 것 같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내 존재의 진정한 자유를 표현하는 유일한 일이 되었다. 또 내가 유일하게 나의 온 정열을 기울여서두하는 일인 동시에, 유일한 나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기도 하다.

- 책 73쪽에서 -

 

주인공 나는 잘나가는 정보 기술자이며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30대이다. 비록 사귀던 여자친구와 2년 전 헤어졌지만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다. 취미생활로 동물 소설을 쓰며 늘 주변 사람과 상황들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 늘 냉소적이고 차갑다. 그에게 세상을 향한 혹은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존재할까 ?

소설 자체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늘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함께 출장을 간 직장 동료 티스랑을 관찰한다.

 

사실 그것은 그의 인격의 근본 문제인데 ---- 몹시 못생겻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못생긴 그의 모습이 여자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는 여자들과 자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 보지만 일은 잘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여자들은 그를 원하지 않는다.

- 책 64쪽에서 -

 

티스랑은 잘나가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직장인이지만 외모때문에 늘 여자들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다. 더 불행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사랑에 좀 무심한 사람이었다면 불쌍한 마음이 덜 했을텐데, 그는 누구보다 사랑을 하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번번이 여성들에게 거부당할 때마다 티스랑은 상처를 받지만 다시 사랑에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티스랑은 출장지의 어느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또 선택을 받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그녀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물론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그는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한다.

 

 

인간에게 사랑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그 욕망은 놀랍도록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잔뿌리들이 마음이라는 물질 속으로 파고든다.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모욕에도 불구하고 브리지트 바르도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렸다.

- 책 110쪽에서 -

 

오히려 사랑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사람일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사랑에 대한 다양한 대상과 상황이 존재한다. 주인공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지 다 무관심하다.

이런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로 세상과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확실히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광고는 신물난다. 정보 기술 또한 역겹다. 정보 기술자로서의 나의 일은 참고 사항들과 이성적 결정의 기준들을 한도 없이이 늘여 나기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부정적인 일이다.

- 책 99쪽에서 -

 

 

발달된  물질문명 사이에서 현대인들은 생활의 편리를 맛보았지만 철저하게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사랑도 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빈인빈 부익부 현상을 낳고 있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실업과 가난 속에 허덕인다. 완전한 자유 섹스체계에서는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서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영역의 확장이다. - 책 119쪽에서 - 

 

책 119쪽에서 작가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는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이 경제와 사랑은 미묘하게 닮은꼴이다. 물론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나라게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들 사이에서도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물론 우엘벡의 말도 설득력이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스스로 요양원을 나와 눈부시게 화사한 날씨 전나무 숲을 달리며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주말을 이용해 읽었지만 사실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다. 우선은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은 아니였고, 사실 나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나 긍정의 힘을 나에게 몰아줄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이왕 손에 든 책이니 정말 인내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사랑조차 투쟁하듯 얻어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자본을 투쟁하는 마음으로 벌고 있듯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처럼 나가올 사랑을 꿈꾸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사랑을 만날 확률은 적어진다는 것이니 참 암담한 일이다.

읽은 책은 꼭 글로 남겨 둔다는 소박한 계획이 이렇게 실천하기 힘든 계획인 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다음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고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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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14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남자'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살피는 '클럽'에 가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다 한다면, 그곳에 있던 '여자'도 '사람을 겉모습으로 살필' 텐데, 스스로 '겉모습을 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될 일이 없으리라 느껴요.

삶도 사랑도 무엇도 겉모습으로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텐데요.

착한시경 2014-01-14 11:25   좋아요 0 | URL
혼자서 차 마시면서 함께살기님이 올리신 글들을 읽어보고 있는 중이예요^^ 투쟁영역의 확장은 뭐랄까...제 맘이 심란한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지 내용도 그냥 심란스러웠어요..ㅎㅎ 겨울은 추우니까 책도 좀 따스한 내용이 좋은거 같다..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무리했어요..사실 우엘벡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그럼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슬프다...전 그런 생각했죠^^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