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와 함께 한 세 권의 책들...

 

덕보다는 악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 본질적으로 악은 적응력이 강한 것이어서 서로 돕고 서로에 대해 너그러운 반면, 덕은 시샘이 많아 서로 다투고 서로를 죽이며, 모든 것에서 편협함과 타협 불가능성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고문하지 않으면, 언어를 부수어 버리지 않으면, 어떤 문학적 독창성도 있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집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시작된 변함없는 요구를 만나게 된다.

 

인간은 시간에 치명상을 입을수록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흠없는 한페이지의 글을 쓴다는 것은, 아니 한 문장이라도 쓴다는 것은 생성과 부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언어를 통하여, 노쇠의 상징 그 자체를 통하여,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죽음을 초월한다.

 

순수한 시간, 사건과 존재와 사물에서 벗어난 해맑은 시간은 밤의 어떤 순간들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때 오직 당신을 파국으로 끌어가려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당신은 느낄 것이다.

-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순간, 나는 아프다 중에서 -

 

 오늘 밤, 별들의 미세한 불빛 속에서

 나무와 꽃이 상쾌한 향기를 퍼뜨려왔다.

 나는 그 사이를 걸었으나,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따금 잠잘 떼

내가 가장 완벽하게 그들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점차 희미해갔다.

 누워 있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러면 하늘과 내가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마침내 내가 누워 있을 때 나는 쓸모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무는 한 번쯤 나를 만질 테고, 꽃은 나에게 시간을 내어

 줄 것이다.

- 실비아 플라스의 나는 수직이다 중에서 -

 

 

좋은 소설이란 '답'이 아닌 그 시대를 산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밖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고전이 매번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고전문학 안나 카레리나, 백영옥 편에서 -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순간, 나는 아프다...부제는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를 읽고 있는 중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저자이기도 한 에밀 시오랑은 생전 어떤 문인들과도 교류하지 않았고 언론의 인터뷰도 사양했다. 그리고 두번이나 권위있는 문학상을 거부하며 평생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왔다.

일반적으로 태어남은 축복, 죽음은 불행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에밀 시오랑은 진정한 불행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태어남이 하나의 파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때, 삶은 마침내 견딜 만한 것이 되고, 마치 항복한 다음 날처럼 투항한 자의 홀가분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245쪽에서 -

 

한번 읽어서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으니,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본다. 태어났다는 것이 불행임을 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을 다양한 비유와 상징으로 이야기 한다.

이 책 역시 목차와 상관없이  눈에 띄는 문장을 읽어도 되니...난 그 무질서함이 좋다.

햇빛이 환한 낮에 읽기 보다는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는 조용한 밤...읽기 좋은 책이다. 물론 너무 어려워 납득이 불가능해지는 상태가 오면 아마도 스르륵 잠드는데도 도움을 줄만한 책이기도 하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 내 자신을 견딥니다.

 

살면 살수록 살아왔다는 것이 점점 더 쓸데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미칠 듯한 괴로움 혹은 끈질긴 불안을 이겨 내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루에 여러 번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면 아침에 눈뜨는 즉시 그 효과를 느껴보다는 게 좋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누군가 나에게 이 말을 묻는다면...난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 열흘 남짓 남은 이 한해를 나는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

돌이켜 보면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무분별하게 사용했던 시간들이다.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했던 시간들은 늘 깊은 후회를 남긴다.

우주 속으로 흩어져 버린 나의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한정된 시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들조차 소중하다.

늘 나에게 너그러웠던 삶의 태도를 성찰하며 좀 더 이성적으로 나를 바라보기로 한다.

문제들 속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삶이 아니라, 그 상황 밖으로 나와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은 좀 더 쉽게 해결될 것 같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선택하기로 한다. (늘 다짐하지만 정말 잘 안되는 것 중 한 가지이다.)

 

 

학교 급식에 나온 달걀을 가져와 수줍게 내미는 윤희...

나는 그런 윤희가 좋다. 웃을 때 반달이 되는 작은 눈도 예쁘고, 중학생답지 않게 작고 앙증맞은 손도 예쁘다. 특히 여리고 착한 마음이 가장 맘에 든다.

물론 윤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교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윤희의 말을 가만가만 들어보면...윤희의 마음이 보인다.

오랫만에 삶은 계란을 보니, 아주 오래 전 기억 저편에 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막내 동생을 낳은 엄마를 대신해서 초등학교 1학년 첫 소풍을 외할머니와 함께 갔다.

그 때... 엄마가 싸 준 도시락 안에 담긴 삶은 계란과 김밥 그리고 칠성 사이다 병이 떠오른다.

첫 손녀였던 나를 지극하게 아껴주셨던 외할머니...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던 손길과 눈빛은 지금도 아련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세로줄 성경책과 주절주절 외우시던 주기도문 그리고 맛깔스러운 할머니의 반찬들, 내 손에 쥐어주던 사탕이나 과자들, 따뜻한 방바닥에서 함께 누워 먹었던 달콤한 귤의 향기를 잊지 못한다.

윤희가 건넨 삶은 달걀 하나가 아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뵙던 날,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하시던 할머니의 모습과 야윈 할머니를 보며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을 모조리 불러 냈다.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랫동안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아무런 조건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왜 이렇게 그리운걸까 ? 이제는 할머니의 얼굴은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았지만 아직도 껍질을 깐 삶은 달걀을 보면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든다.

햇살 따뜻한 봄날, 첫 손녀의 소풍을 즐겁게 따라 나섰던 할머니도 오랫동안 그 시간을 잊지 못하셨다. 이렇게 내 삶 속에서 사리진 사람들의 기억은 늘 아픈 아름다움이고 뼈아픈 후회들이다.

 

내가 경험했던 죽음들은 모두 겨울이다. 그래서 나의 겨울은 아프고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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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나스 2013-12-1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틋한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지는군요
사랑은 이처럼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또한 한없이 슬프게도 하는군요....
겨울을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있잖아요
좋은하루 되세요~

착한시경 2013-12-18 14:53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환한 햇빛을 보니,,, 기분이 넘 좋아져요^^
겨울이 있기에...봄이 더 따뜻한거겠죠~ 조건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기억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플라타나스님도 편안한 오후 보내세요~

마녀고양이 2013-12-1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달걀이 참 맛있어 보여요.

방금 전화 한통을 받았는데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상처를 쉽게 받아서
그것이 예술의 깊이를 주거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분명 큰 자산이 되겠지만
가능하면 안 겪고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에밀 시오랑의 글을 읽으니 다시 생각나네요.

하지만......
저에게 지난 고통을 포기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제 딸아이는 분명 겪지 않았으면 하고 금방 네! 대답을 할건데요.


착한시경 2013-12-18 14:56   좋아요 0 | URL
역시 삶은 계란은 사이다에 먹어야 하는데,,, 사이다가 빠져서 좀 아쉬웠어요~
우리 삶에 고통이 있기에 행복이 상대적으로 더 소중해지는거 같아요~그래도 고통은 언제나 견디기 힘든 짐이니...저두 피할 수 있으면 피해버리고 싶긴 해요..
에밀 시오랑 책을 읽기에는 날씨가 넘 좋아요~^^

baby 2014-01-0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렵네요...^^; 한 문구가 제 마음과 같아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