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 동안 내린 눈이 아파트 뒤...계족산을 하얗게 덮었다. 오후의 옅은 햇살은 도로 위의 눈을 녹게 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늦가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속절없이 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다짐했던 수많은 계획과 각오들....

특히 100권의 책을 읽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마흔이라는 생의 전환점에서 100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대책없는(?) 일을 저질렀고, 그 무모함 속에는 책 속에서 길을 찾아 보리라... 그래서 후회없는 40대를 보내리라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올해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고, 가장 적게 읽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

밀린 숙제 앞에서 시계를 보며 쩔쩔매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 진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25살에 머물러 있고, 읽고 싶은 마음에 미리 다 구입해 버린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책상에 쌓여있다. 이런 중에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손에 있는 책은 시집 두 권이다.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 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해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

 

랭보와 견주어지는 천재 시인 예세닌... 미국 여자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사랑,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이혼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하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이별의 시 -

 

잉크가 없어 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피로 쓴 마지막 시....

두서없이 읽다가 발견한 시 한편에 눈길이 갔다. 사실 시인보다는 시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연상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띄였다.

자동차 뒷 바퀴에 스카프가 걸리면서 목 골절로 죽음을 당한 비운의 무용수 던컨과 불같은 사랑에빠졌던 젊은 시인 예세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들 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 사물에 대한 깊은애정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래 전... 첫 눈을 간절히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눈이 오면 만나자는 유치한 약속을 하기도 했고... 우연히 첫 눈을 함께 보게 되는 날이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늙는다는 건... 경험해야 하는 것보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혼자 커피를 마셨고, 하릴없이 많은 책들을 뒤적였다.

 

 

이 해가 가기 전... 수전손택의 책을 마무리 해야 하고, 은밀한 생을 통해서 키냐르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다가 잠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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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상당히 재미있어요.

착한시경 2013-11-29 19:46   좋아요 0 | URL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요^^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