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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사랑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바람이 기억을 가져다 주지 않아도 사랑은 내 한 켠에 있는데, 살을 에는 바람은 네 속에 아직 그 사람이 있는 거 맞지, 라며 후벼 팔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아 사랑이 내 뼈 속에 있을지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이 불어 눈물이 나는 것은 바람때문이 아니라 내 뼈가 녹아서 눈물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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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죄와 벌 -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두려움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 두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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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얇고 그리 어렵지도 않으나, 재미는 없는 책. 이렇게 참 보기 드문 책을 다 읽지 못한 채로 책장에 꽂아두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면에는 그래도 이번 달에는 책 한 권 읽었어, 라는 뿌듯함을 챙기고 싶은 게다. 또 한 가지, 어느새 내 자신이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만으로 열광하지 못 하는 존재임을 알아차렸기에, 나는 내 스스로에게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가 왜 처벌받아야 하는지 설득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게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또 다른 부정의를 잉태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2.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 인정 여부


만일 민족이나 국가의 절대성을 긍정한다면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절대성의 긍정을 위해서는 먼저 국가 또는 민족을 정의와 동일시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긍정을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개념 설정이 필수적이다. 개념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에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제 논의는 국가 또는 민족과 인간 간의 관계 설정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일치’라는 판단이 나온다면 참 좋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무관계’ 혹은 ‘과도할 경우 모순’이라는 팻말을 든다. 19C 후반 서구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이 제국의 확장에 의존하고 있었다던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 대부분의 좌파들이 전쟁에 대해 지지 혹은 침묵했다던가, 1917년 2월 러시아 임시정부의 좌파 각료들이 새 제국 건설이라는 목표 하에 봉기의 원인이 된 정책의 지속에 동의했다던가 하는 것들은 이를 나타내준다. 


이와 같이 과도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인간을 수단화하며 객체화하게 된다. 물론 피압박의 현장에서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인간과 일치하며, 정의에 부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을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반민족행위자 혹은 반국가행위자의 사상과 그에 따른 행동은 존중되어야 하는지 여부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이 부정된다면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는가. 선국가적 개념인 자유를 이유로 해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반국가 혹은 반민족이라는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무어라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존중하리라.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자국민에 대한 수탈과 압제까지 정당화시켜주지는 못 한다. 이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에 기반 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에 기반 한 비난이며 ‘정의’에 기반 한 비난이다.


그들은 혹시라도 다른 시대에서의 압제·수탈자와의 불평등성을 토로할지 모른다. 평화 시대에도 또한 압제·수탈자는 있어왔으며-현시대에도 그렇지 않은가! - 그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을 거론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정의에 대한 시대적 평등까지 바라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정의를 따를 뿐이다. 우리 역시 부정의에 대한 시대적 불평등이 너무도 아쉽다. 당신들과 반대의 이유로!

 

4. 처벌의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


(1) 피강점기의 행위에 대한 처벌


이 시기의 행위에 대한 처벌은 일종의 소급입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의 목적은 오로지 정의에 국한되어야 하며, 사적 보복이나 국가의 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의할 때 처벌의 주된 목적은 예방이 아니라 응보여야 한다.


(2) 프랑스의 처벌은 성공적이었는지 


책에 언급된 바와 같이 지성인에 대한 처벌은 법관이나 자산가에 비해 매우 엄중했다. 하지만 이는 지성인들의 책임과 사명이 자산가나 법관 보다 중해서가 아니라 재건 프랑스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갖지 못 했다는 데에 있다.


시몬 드 보브아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피력한다.


“사람들은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형을 내렸다고 비난한다. 나는 경제적인 부역자들을 용서하는 게 너무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브아르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형을 내렸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비난할 것은 대서양 장벽에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에게 훨씬 더 가벼운 형을 내렸다는 것이다.”


(3) 정의를 세운다는 것의 문제


우리는 정의를 위해 무언가를 행할 때, 역시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지능력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 회복이라는 의욕이 앞서 부정의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처벌은 ‘최소한의 최대한에 대한 확실하고도 단호한 처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것은 그 행위가 민중에 대한 압제와 수탈이라 ‘명백히’ 인정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최대한’이라 함은 그 대상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이어야 하며 압제·수탈이 명백히 입증되는 ‘모두’여야 함을 의미한다. 또 ‘확실하고 단호한 처벌’이라는 것은 국가 재건 등의 여하한 목적으로도 처벌을 완화하거나 면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 나오며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그래서 머리 한 켠에 접어놓았던 의심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놀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전혀 그러하지 아니한데, 이런 논의가 과연 쓸모가 있을까. 찹찹해진다. 그래도 우리를 끌고 왔던 건 언제나 희망이었지 않냐는, 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며 생각의 마침표를 찍는다.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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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반에 쓴 글. 지금 기억으로도 정말 재미가 없었다. 이렇게 재미 있을만한 주제를, 그렇게 재미 없게 써 놓은 건 저자일까, 역자일까. 별 한 개를 주면서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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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11-2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좋은 리뷰를 써주시고, 별 하나를 주시면 어쩌자는 거예요~~ 으크크
근데, 너무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음...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자면, 19C에 법은 정의에 국한되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중요시했다는 거죠. (복수하는 정의의 여신.. 그림이 떠오르는..)

그런데 이 부분이요..
하지만 정작 비난할 것은 대서양 장벽에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에게 훨씬 더 가벼운 형을 내렸다는 것이다.”
-> 가벼운 형이 아니라, 무거운 형이.. 아닐까요?

그래야.. 논리상..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제가 이해를 잘못 한 걸까요? ㅠ_ㅠ
궁금해서 남겨봅니다. 으흐.. 공부 잘 하고 갑니다.

밤바다 2007-11-2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걸 꼼꼼히 다 보셨단 말이예요? 놀라워라 놀라워라~~ ㅎㅎ
지금 다시 읽어봤는데 저도 어렵네요. (올릴 때는 그냥 긁어 붙였다는 말쌈~ -.-;)

어? 그런데 '19C에 법은 정의에 국한되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중요시했다는' 내용은 대체 어디에서 추론하신거죠? (두리번 두리번,,,, -.-;;)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답은 이래요~
프랑스에서 자산가에 대한 처벌은 지성인에 대한 처벌보다 많이 약했거든요.

1. 이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
: 지성인들에게 더 중한 형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자산가 형을 보통형으로 생각)

2. 1에 대한 보브아르의 비판
: 지성인들에 대해 중한 형을 내린 것은 정당하다. (자산가에 내린 경한 형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3. 1에 대한 밤바다의 비판
: 오히려 자산가에 경한 형을 내린 것이 비난받을 일이다. (지성인에게 중한 형을 내린 것은 당연히 잘한 일이고, 자산가 역시 지성인처럼 중한 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논지였답니다.

보브아르랑 다른 점은 자산가에게 경한 형을 내린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만 평가하느냐(보브아르), 아니면 비난받아야 할 일로 평가하느냐의 차이지요.
어떻게 보면 말장난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암튼 이렇습니다.
이거 다 읽어주시니 어찌나 고마운지요~~ 감사합니다. ^^

가시장미 2007-11-30 09:14   좋아요 0 | URL
이 시기의 행위에 대한 처벌은 일종의 소급입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의 목적은 오로지 정의에 국한되어야 하며, 사적 보복이나 국가의 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의할 때 처벌의 주된 목적은 예방이 아니라 응보여야 한다.

-> 이부분에서 추론한거죠. ^-^;;

아 그렇군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으흐

밤바다 2007-12-0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찐한 술자리 덕에 이제야 댓글을~~ 흐흐

생략된 단어를 몇 개 풀어봐 드릴께요. ^^
:이 시기(피강점기)의 행위에 대한 (사후적)처벌(을 규정하는 법)은 일종의 소급입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소급입법)의 목적은 오로지 정의에 국한되어야 하며, 사적 보복이나 국가의 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의할 때 처벌의 주된 목적은 예방이 아니라 응보여야 한다.

아... 주말엔 몰 해야 될까??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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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주: 주주자본주의의 강화가 소득불균형과 고용 악화로 연결된다는 내용)

O 이윤이 떨어지면, 당장 주가가 떨어지고, 주가가 떨어지면 당장 외부에서 경영권을 위협받으니까 단기이윤을 많이 내야 합니다. 거기에서 제일 쉬운 방법은 투자를 안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산업 전반적으로 투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거고요. 그 다음에 단기이윤을 낸 것 중에서도 주주들에게 배당을 많이 한단 말이예요. 예를 들어 포스코도 무조거 50퍼센트 이상 배당, 이런 식으로 정책을 세워놓는단 말이죠. 그러면 결국 거기서 나온 것을 주주한테 많이 나눠주는 만큼 투자할 능력이 떨어지는 거고, 동시에 단기이윤을 많이 내려고 하다보니까 될 수 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많이 쓰고, 하청단가 깎고, 그래서 노동자나 중소기업에 압력을 넣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거죠.-19쪽

O 사람이 어느 환경에서 태어날지 모르는거 아닙니까? 최소한 의료, 복지 같은 기본적 제도들이 잘 정비되어서 누구나 다 보장받은 상태에서 경쟁하는 게 공정한 경쟁이지, 한 놈은 발에 납덩이 달고 걷고 있는데 한 놈은 자동차 타고 달려가면서 "뒤떨어진 놈은 낙오자"라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되죠.-35쪽

O 주가지수는 국민생활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죠. 그거는 외국인 투자자가 다수인 상황에서 그 투자자들이 우리 주식시장에 돈을, 그것도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넣었다 뺐다 하면서 단기차익을 보는건데, 그러니까 시세차익을 얼마나 볼 수 있나 하는 그들의 판단에 따라 주가지수가 결정되는 것인데 주가지수가 높다고 해서 경제가 좋다고 말아는 것은 웃기는 거죠.

- 물론 아! 맞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비경제학도인 나로서는, 외국 투자자가 단기차익을 보려고 넣었다 뺐다 하더라도, 다수가 그 짓을 하며 그리고 그 다수가 모의한 작전세력이 아니라고 한다면, 주가지수의 '분명한 장기적' 상승을 경제호전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의문이다. 물론 경제가 좋아졌다는 것과 국민생활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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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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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언제나 그랬다. 통보의 형식이든 합의의 형식이든, 실질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우리 헤어지자.”거나 “나 이사할래.”거나, 결국 수습은 상대방 혼자의 몫이다. 천재지변에 준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라는 건 찾아볼 수가 없다. 휴대폰에서의 번호 삭제도 내가 해야 하는 것이고, 함께 영화 볼 사람을 따로 찾아야 하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된다. 괴로움에 미칠 듯이야 하겠지만, 결국 술에 쩌는 것도 제가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먼저 알아주지 않는 ‘내상’이라는 것,  이별은 그래서 더욱 극심하게 아파온다.

물론 잡아보기도 할 지 모른다. 격렬하게 키스를 시도하거나, 혹시 섹스를 할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사람을 위한 맛있는 요리를 할지 모른다.

만용을 부릴 수도 있다. ‘제까짓게 어딜 가?’라면서 담담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만용이 만용으로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당황스러움이란. 잡으려면 그 때 잡았어야지….

낙하하는 저녁은 이별 이야기이다. 슬퍼서 엉엉 우는게 아니라 미치도록 담담한 소설이다. 목이 메여오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그렁거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사랑할 때와 다름없이 그 사람이 청소를 하는 시간에 청소를 하며, 그 사람의 새로운 전화번호를 전화기에 기억을 시킨다.

하지만 그것으로 비어짐이 채워지면 얼마나 좋겠누. 그러함으로 이별이라는 사건을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누. 아니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누. 하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물론 돌아갈 장소를 잃는 것’(에쿠니 가오리 ‘요이치도 왔으면 좋았을 걸’중)임을 우리는 이별을 맞이하고 나서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읽은 지가 너무나도 오래된 소설. 그 탓에 나는 다른 이야기들이 가물가물하다. 작가 에쿠니가오리에게 감탄을 하다가, 역자 김난주를 기억하게 만든 책. 그만큼 번역이 잘 되어있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하드카바가 아깝지 않다.

 

- 200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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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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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노동운동에 처음으로 의구심을 품은 것은, 방현석의 '겨울미포만'을 접하면서였다. 그 전에는 노동 계층은 약자니까, 라는 막연한 생각의 암묵적 호응, 그것이 다였다. 방현석의 소설에서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는 대목을 접하고는 '어라 그럼 도대체 뭔데?'라는 물음을 잡았다. 자본주의 사회임을 인정하는 이상, 노동자의 인간다운 권리의 확보는 적정한 임금의 확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가득차 있던 내게, 방현석은 물음만을 던져놓고 답은 내놓지 않았었다.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울산지역 26개 사업장의 공통된 요구사항이었다. 다름 아닌 ‘두발 자유화’. 무언가 둔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 이 대목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물질적 작업환경보다는 인격적 모멸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구해근의 기술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2. 노동운동의 목적

 

 

노동운동의 목적이 임금 등의 물질적 작업환경이냐, 아니면 인격적 가치냐는 노동운동에 대한 시각을 크게 바꾼다. 그 두 가지는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한다 해도.

 

물질적 작업환경의 조성은 사용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목적을 물질적 작업환경이라 잡는다면 노동운동의 필요성 여부 또한 노동자보다는 사용자에 의해 좌우된다. 사용자에 의한 물질적 작업환경의 조성이 있은 후에야 노동자는 그 작업환경의 수용여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작업환경은 독자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체제하의 자유경쟁시장에서 사용자는 생산비의 절감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요구는 자체제어력이 없다. 그에 따라 작업환경은 노동자가 수용할 수 있는 최저한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노동자의 최저수용선은 자연스레 국가 또는 기업의 경제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경제상황이 악화될수록 사용자, 국가, 제3자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최저수용선을 낮추라고 요구한다. 당해 노동자 또한 알 수 없는 자체제어를 통해 최저수용선을 낮추게 된다. 이렇듯 노동운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어느새 노동운동의 결정과정에 있어서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노동운동 목적을 인격적 가치, 혹은 인간다운 삶으로 설정한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노동운동의 필요성은 작업환경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경우에도 경제상황은 고려된다. 하지만 경제상황은 기업이 노동자의 생활터전이라는 이유에서 ‘고려’될 뿐이지,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노동운동에서의 주체인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작업환경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가치관의 준거로서의 헌법 


 

노동운동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가치관은 너무도 중요하다. 가치관으로부터 그 사물에 대한 해석이 나오며 우리의 행동이 결정된다, 하지만 어떠한 논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개인적 가치관을 무턱대고 주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공동체 내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가치관이 어떠한 준거를 가지고 있어야 함은 이러한 이유에서 중요하다. 나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전제하는 한에서, 헌법만큼 강력하고 좋은 준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중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가장 좋은 논거는 헌법 제34조1항으로 보인다. 헌법 제34조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술한다. 우리는 인간다운 생활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4. 인간다운 생활 


 

우리는 ‘인간답다’라는 어구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개별 상황에서의 구체화가 그리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영화 ‘오아시스’를 떠올려보자. 설경구는 문소리를 휠체어에 태워 시내로 데이트를 나간다. 식사시간이 되고 그 둘은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음식점에서는 테이블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지 않는다. -그 때 댄 핑계가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것이었는지, 예약이 되어있다는 것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 그 음식점은 2인분의 음식 값을 버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가게에 더 많은 손님-장애인을 들임으로 발길을 돌릴 지도 모르는- 을 받겠다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비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음식점이 문소리를 가게에 들이지 않는 대신 무료로 음식을 포장해주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도 음식물의 무료 제공이라는 음식점의 경제적 손해와 둘의 경제적 이득이 상황의 비인간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다. 


 

이렇듯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 경제성과는 무관계하거나 반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다양한 사안에서 양자택일, 혹은 어느 한 군데에 무게를 둔 조화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노동관련 법제도의 결정은 이의 대표적 문제이다. 


5. 비정규직 관련 법안에 대한 노사 양측의 입장 - 참고자료 참조 


 

노사 양측 모두는 비정규직 관련 정부의 법률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경영계의 반대는 고용시장의 경직성으로 인한 실업률의 증대 가능성과 계약자유 원칙을 이유로 한다. 이 논의는 ①기업에서의 인건비 고정(이른바 ‘경제성’)과 ②노동법은 민법의 특별사법임을 전제로 한다.

 

노동계의 반대는 정부법안의 부작용을 이유로 하며, 반대에 그치지 않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명문화, 파견법 폐지까지 주장한다. 이 논의는 노동법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6. 노동법의 본질 - 참고자료 참조 


 

우리는 여기서 노동법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노동법이 민법의 특별사법이냐, 혹은 민법과는 별개인 사회법이냐에 따라서 노동법이 취해야 할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참고자료에서 확인하였듯이, 노동법은 소유의 불평등으로 인해 사적자치 원칙이 근로계약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경험으로부터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는, 물론 이론은 있지만,  노동관계에서만큼은 사적자치의 원칙이 최소화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노동법이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7. 경영계의 비교법적 사고에 대하여 


경영계 주장의 주요한 논거는 외국의 입법례이다. 실제로 노동법 자체만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노동법은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 비해 고용의 경직성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모든 법은 그 하나만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 된다. 현대에 있어서의 모든 법은 역할법의 기능을 한다. 모든 법이 하나의 사회를 위해 존재하고, 따라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사고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노동법은 사회법의 영역에 속하기에 여타의 사회법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법의 비교를 위해서는 사회 제반 여건이 먼저 비교되어야 한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사회안전망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한국의 여건 하에서 노동법만을 별개로 비교, 고용의 경직화를 탓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의 노동조건은 사회안전망의 기능까지 담당해야하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누군가에게서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수의 도태는 필수적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격적으로는 매우 좋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하다 결국은 가치관의 차이라 결론을 맺었었다. 암담했다. 누구를 위한 발전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집착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풍조를 어떻게 뛰어넘어야 하는가. 

난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고루 잘 살기를 원한다. 그저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꿈꾸며,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안타까움으로 그대들과 함께 가련다. 세상을 향한 나의 사랑이 의심쩍다면 그대들의 세상을 향한 사랑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련다. 모든 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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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모임의 발제문이었다. 그동안에 비정규직법은 통과되었고, 나는 어느새 비정규직 차별 판단기준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또 88만원세대라는 말이 정착되고 있기도 하다. 상황은 이럴찐데 대선은 암담하며, 진보진영은 말 그대로 지리멸렬하다. 맘편하라고 케세라세라를 부를까도 싶지만, 그리한다고 맘이 편해질 것 같지는 않다.

 

참고적으로 본문의 참고자료 파일은 올리기를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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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11-27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거울 수밖에 없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내용을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이해될 수 있도록 써주시다니.. 대단하시다니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예전에 님이 그러하셨듯이, 아직까지는 암묵적인 호응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아니, 그것보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노동계층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일테니까요.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모임을 갖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을 읽고, 이런 모임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니.. 말입니다. 논문, 제대로 멋지게 써주시길.. :)

밤바다 2007-11-2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은 있으되, 그 정도가 문제이지 않은가 싶어요. 실은 그냥 눈감고 싶을 때가 가끔 있었어요. (물론 눈 뜨고 있다 하여 행동으로 나가는게 있지는 않지만서도 말입니다)

요새는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모 후보가 대권을 잡아버리면(정말로 끔찍한 일이지만 -.-;;) 우리 민중들이 화들짝 깨지 않을까 거기에 희망 아닌 희망을 품기도 하구요. 또 내가 하는 말이 옳으니 너희가 공부해서 좀 따라와줘, 라고 훈시하는 듯한 진보진영의 전략부재에 화가 난지는 오래됐습니다. 전략부재도 그 정도면 무책임한게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쉽고 재미있으시다니 고맙기도 하고, 놀라운데요? 솔직히 오아시스 이후 부터는 재미 없지 않나요? ㅎㅎ 논문... 법학 논문이라는게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나서 멋진 논문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왜 법학을 해야하지, 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거든요.

몸... 어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우리 목사님께 당돌하게도 물어본 적이 있답니다.
"목사님은 왜 살아요?"
답은 이랬습니다.
"아직까지는... 내가 존재하는 게, 내가 없는 것 보다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 믿으니까."

때로는 개인의 건강관리도 사회성을 띤답니다. ^^

다락방 2007-12-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댓글의 마지막 문장 굉장히 근사한데요.

때로는 개인의 건강관리도 사회성을 띤답니다.

멋져요.

밤바다 2007-12-03 13:43   좋아요 0 | URL
제가 칭찬받는 거에 상당히 어색해 한답니다. ^^
다락방님 댓글을 보니, 제가 막 어색해 하는 걸 다시 알아차렸습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에 무어라 무어라 나오던데,
아직까지 칭찬 대응법(?)을 찾지 못했어요~ ㅋㅋ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사진 상당히 근사한데요?

이 정도면 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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