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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죄와 벌 -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두려움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 두레 / 2005년 1월
평점 :
1. 들어가며
얇고 그리 어렵지도 않으나, 재미는 없는 책. 이렇게 참 보기 드문 책을 다 읽지 못한 채로 책장에 꽂아두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면에는 그래도 이번 달에는 책 한 권 읽었어, 라는 뿌듯함을 챙기고 싶은 게다. 또 한 가지, 어느새 내 자신이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만으로 열광하지 못 하는 존재임을 알아차렸기에, 나는 내 스스로에게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가 왜 처벌받아야 하는지 설득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게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또 다른 부정의를 잉태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2.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 인정 여부
만일 민족이나 국가의 절대성을 긍정한다면 반민족행위 혹은 반국가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절대성의 긍정을 위해서는 먼저 국가 또는 민족을 정의와 동일시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긍정을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개념 설정이 필수적이다. 개념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에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제 논의는 국가 또는 민족과 인간 간의 관계 설정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일치’라는 판단이 나온다면 참 좋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무관계’ 혹은 ‘과도할 경우 모순’이라는 팻말을 든다. 19C 후반 서구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이 제국의 확장에 의존하고 있었다던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 대부분의 좌파들이 전쟁에 대해 지지 혹은 침묵했다던가, 1917년 2월 러시아 임시정부의 좌파 각료들이 새 제국 건설이라는 목표 하에 봉기의 원인이 된 정책의 지속에 동의했다던가 하는 것들은 이를 나타내준다.
이와 같이 과도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인간을 수단화하며 객체화하게 된다. 물론 피압박의 현장에서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인간과 일치하며, 정의에 부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을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반민족행위자 혹은 반국가행위자의 사상과 그에 따른 행동은 존중되어야 하는지 여부
민족 혹은 국가의 절대성이 부정된다면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는가. 선국가적 개념인 자유를 이유로 해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반국가 혹은 반민족이라는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무어라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존중하리라.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자국민에 대한 수탈과 압제까지 정당화시켜주지는 못 한다. 이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에 기반 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에 기반 한 비난이며 ‘정의’에 기반 한 비난이다.
그들은 혹시라도 다른 시대에서의 압제·수탈자와의 불평등성을 토로할지 모른다. 평화 시대에도 또한 압제·수탈자는 있어왔으며-현시대에도 그렇지 않은가! - 그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을 거론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정의에 대한 시대적 평등까지 바라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정의를 따를 뿐이다. 우리 역시 부정의에 대한 시대적 불평등이 너무도 아쉽다. 당신들과 반대의 이유로!
4. 처벌의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
(1) 피강점기의 행위에 대한 처벌
이 시기의 행위에 대한 처벌은 일종의 소급입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의 목적은 오로지 정의에 국한되어야 하며, 사적 보복이나 국가의 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의할 때 처벌의 주된 목적은 예방이 아니라 응보여야 한다.
(2) 프랑스의 처벌은 성공적이었는지
책에 언급된 바와 같이 지성인에 대한 처벌은 법관이나 자산가에 비해 매우 엄중했다. 하지만 이는 지성인들의 책임과 사명이 자산가나 법관 보다 중해서가 아니라 재건 프랑스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갖지 못 했다는 데에 있다.
시몬 드 보브아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피력한다.
“사람들은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형을 내렸다고 비난한다. 나는 경제적인 부역자들을 용서하는 게 너무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브아르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형을 내렸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비난할 것은 대서양 장벽에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보다도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에게 훨씬 더 가벼운 형을 내렸다는 것이다.”
(3) 정의를 세운다는 것의 문제
우리는 정의를 위해 무언가를 행할 때, 역시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지능력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 회복이라는 의욕이 앞서 부정의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처벌은 ‘최소한의 최대한에 대한 확실하고도 단호한 처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것은 그 행위가 민중에 대한 압제와 수탈이라 ‘명백히’ 인정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최대한’이라 함은 그 대상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이어야 하며 압제·수탈이 명백히 입증되는 ‘모두’여야 함을 의미한다. 또 ‘확실하고 단호한 처벌’이라는 것은 국가 재건 등의 여하한 목적으로도 처벌을 완화하거나 면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 나오며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그래서 머리 한 켠에 접어놓았던 의심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놀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전혀 그러하지 아니한데, 이런 논의가 과연 쓸모가 있을까. 찹찹해진다. 그래도 우리를 끌고 왔던 건 언제나 희망이었지 않냐는, 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며 생각의 마침표를 찍는다.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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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반에 쓴 글. 지금 기억으로도 정말 재미가 없었다. 이렇게 재미 있을만한 주제를, 그렇게 재미 없게 써 놓은 건 저자일까, 역자일까. 별 한 개를 주면서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