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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가 끝나고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거리로 향했다. 오늘(27일)은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청계광장을 벗어난 대열은 을지로로 방향을 트는가 했더니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유턴을 두 번이나 했다.

 

명동 쪽으로 향해 가기에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정리하는가보다 했더니 계속 직진해서 명동성당을 끼고 돌아 을지로 4가 쪽을 향하다가 경찰에게 막혔다. 그러나 충돌을 피하고 다시 유턴, 명동 내부를 통과해서 롯데백화점으로 향하다가 다시 경찰에게 막히자 이번에는 명동 밀리오레 앞으로 와서 정리집회를 했다(그 뒤 내가 빠진 뒤에도 집회는 이어져 또 백여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왜 이런 경로를 나열하나 하면, 이 대열에는 '좌표'가 아니라 '지속' 그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즉, '청와대로 가자!'는 등의 이동 목표가 없고, 열리면 가고, 막히면 돌면서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 살아남자는, 전자가 근대적 운동기획이라면 후자는 마치 생명체의 삶의 본능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었다.

 

시위대 앞에 지도방송을 하는 누군가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시위대는 비조직적이었고 산만했다. 그런데도 비폭력 원칙을 확고히 지켜 불필요한 경찰과의 충돌을 피한 것은 훌륭했다. 일부 격화된 시위대가 경찰에게 목청을 높이며 싸울 태세를 보였지만, 대부분은 평화 기조를 지키려는 분위기였다. 어린 학생들과 아이들, 주부들도 있어 더욱 분위기는 그러했다. 그리고 난 비폭력 평화행진의 기조를 확고히 지지한다.

 

시위현장에서 <조선일보> 기자와 대화하다

 

마침, <조선일보> 기자인 선배를 거리에서 만났다. 예전에 술도 같이 많이 먹던 선배였고, 취업이 안 돼 괴로워하다가 어떻게 <조선일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핼쑥한 얼굴로 변명도 많이 하던 선배였다. 그 속에서 자신이 대학시절 배운 가치들을 지켜나가겠다고 얘기도 했지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진리이기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다행히, 그 선배와의 관계는 그런 의식에 의해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어이, 조중동!"

"조용해! 나 맞아 죽는다."

 

입사한 지 4년차인가 그런데 아직 시위 취재 담당이냐고 놀렸더니, 자기 '쫄따구'들은 다 지방에 가 있어서 벌써 며칠째 고생이란다.

 

"기사 좀 잘 쓰지! 왜 자꾸 욕 먹게 써?"

"내가 쓰는 거 아냐. 몇 시, 몇 명 이런 거 불러주면 안에서 써."

 

그런 거구만. <조선일보>에서 촛불집회가 '불법시위'로 변질되었다고 쓴 후 자기도 '밤길 조심해라'는 이메일을 수백 통씩 받고 있단다.

 

"그렇지만, 이렇게 거리를 점거하고 하는 시위가 불법시위지, 평화시위는 아니잖아?"

 

왠지 대화가 재미있어졌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과정은, 과거에 따르던 가치를 돌연 다른 가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질서'의 눈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시위를 하라, 법 테두리 내에서. 요구를 하라, 제도 안에서. 위험하거나 돌발적이지 않게. 그러나 질서화된 가치는 이미 생동하는 진보일 수는 없다.

 

"'OO시위'라고 할 때 'OO'에 넣을 수 있는 건 다양하지. '밤샘' 시위일 수도 있고, (무장하지 않았으니까) '평화' 시위일 수도 있고, 집시법을 위반했으니까 '불법' 시위라고 할 수도 있지. 어떤 사건이라도 속성은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왜 다른 속성은 제쳐놓고 하필 '불법'이라는 속성으로 사건을 정의하려고 하느냐지. 그 역시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음…. 사실 청계광장에 앉아 집회할 때만 해도 나쁘지 않게 봤는데, 이렇게 밤 늦게 거리를 점거하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의미? 사실 전술적으로 얼마나 유효하냐, 이런 문제라면 난 이 방식이 최고라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의미를 묻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논리정연하게 자기 행동을 시작하는 게 아니잖아. 또 어차피 이들의 힘으로 경찰을 뚫고 청와대에 갈 수도 없고, 간다 한들 뭘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매체가 있어, 뭐가 있어. 효율성의 면만 놓고보면 우리에게 의미있는 수단은 어차피 없어.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의 행동에서 이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는지를 느끼는 거지. 국민들이 이렇게 분노하고 절망하는데, 정부는 어떻게 할 거냐, 이게 핵심이지."



명령하라, 이뤄질 것이다? ... 시민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다

 

앞서 이 시위의 양상이 운동권들에게 익숙한 '좌표를 향한 이동'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본능 같다고 했다. 맞다. 어차피 대중이란, 그 안에 규정할 수 없는 역동성이 있다. 생물처럼, 본능적이긴 하나 비논리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

 

정치적 지도력이란, 이러한 대중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들을 설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어떤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리 만들어 놓은 틀을 들이대며 그것이 질서라고 우기는 것은, 결단코 성공할 수 없는 지도력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도 나오지 않는가? 자신이 과학자라고 공룡을 통제할 수는 없다. 특히 유전자 조작 같은 '간단명료한' 방법 따위로는.

 

'명령하라, 이뤄질 것이다.' 건설회사 사장으로선 익숙한 방식이겠지만, 시민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시민사회가 무질서하고 '비정상적'이라고 보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그 역동성과 돌발성이 있어야 건강한 시민사회다.

 

지금 시민들이 이렇게 화를 내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이, 역으로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만드는 밑거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제발 그 허상 뿐인 질서에 매달리지 말고, 사태의 근원을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몇 명의 시위대를 잡아 가두거나, 배후세력이 어쩌니 하고 떠드는 것은 사태를 악화하는 지름길이다.

 

비록 가난한 국가지만 그래도 제 국민이 지지하는 쿠바 사회주의 정부는 카스트로를 빼고 말할 수가 없다. 카스트로는 어느 날, 대통령궁 창문을 열고 아래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외쳤다고 한다.

 

"어이! 이웃 니카라과가 설탕이 부족하다고 한다. 우리는 많이 남으니 한 100톤 정도 보낼까?"

 

그랬더니 시민들은 자기들끼리 막 토론하더니 "좋소, 카스트로! 보내버려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독특한 카리스마를 갖고 대중과 소통하기를 두려워 않았던 카스트로기에, 50년의 장기집권 뒤에도 망명하거나 유폐되지 않고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아직도 문제를 모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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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한 시 반 귀가, 세 시 취침.

아무래도 이명박 정권이 집회형태를 가두시위 양상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가면 갈수록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딱 하나만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인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0.01%라 해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은 사람은 부자입니까, 아니면 빈자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 계십니까?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고등학생이 수업시간중에 선생님에게 귀를 잡혀 끌려갈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계십니까?

평회시위 도중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시민들이 연행되었을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계십니까?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계실까요?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또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한 부분을 인용(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홍병룡 역, IVP 간, 재인용)하며 마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의 의(義), 그 분꼐 순종하여 이루어야 할 인간의 의-아모스 5:24에 따르면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할 공의-는 위협당하는 무죄한 자, 억압당하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의 편에 서서 반드시 공의를 도모할 책임이 있다. 이 때문에 자기 백성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그들의 편을, 아니, 그들의 편만을 옹호하시는 입장을 취하신다. 그리고 교만한 자를 반대하며 낮은 자의 편에 서시고, 이미 권리와 특권을 향유하는 자를 반대하시며 그것을 빼앗긴 자를 선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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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중에 한의사가 한 명 있다. 나보다 두 살 위이니 대략 비슷한 세대다. 부인도 같은 대학을 졸업한 한의사다. 부부 한의사이니 당연히 벌이가 괜찮을 것이다. 집은 신도시에 있다. 이 정도면 대략의 선입관이 잡히는 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볼 때마다 그런 선입관을 바꿔 놓았다. 일단 지극히 환경 친화적으로 산다. 먹을거리부터 소비생활이 엄격했는데, 이건 뭐 한의사니까. 그 다음, 아이들 사교육을 하나도 안 시킨다. 그리고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한다. 알고 보니 집이 전세다. 그 전세금 빼면 남한강 근처에 집 사서 살 거라고 한다. 폐교될 뻔한 초등학교 하나를 주민들이 되살려 놨는데 아이들을 거기 보낼 거란다. 결정적인 건 이것이었다. 진료 시간을 일주일에 2번으로 줄여 버렸다. 일하는 시간 줄여서 아이들하고 시간 더 보내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할 거라고 한다.

선거철이라 그런지 요즘 ‘진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진보는 지금 붕괴되고 있다. 정치세력으로서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대운하가 공약이니 아니니, 박 모 씨가 네 편이니 내 편이니, 아무리 심드렁하게 봐도 선거판은 유례없이 저질인데, 진보는 여전히 무기력하다. 심지어 요즘 같아서는 ‘차떼기’가 재현되어도 똑같을 거라고들 하지 않나.

원인이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이고, 이런 고담준론은 솔직히 지겹다. 다만 이런 생각은 요즘 자주 한다. 어떤 생활이 진보적인 생활인가, 어떤 태도가 진보적인 태도인가, 그리고 이런 자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요즘 들어 많이 변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투표장에 가서는 진보정당을 찍고 컴퓨터 앞에서는 주식투자를 위해 뉴스를 검색하는 사람보다는, 저 일하기 싫어하는 한의사가 훨씬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취향은 모른다. 어쩌면 2번을 찍고 다닐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투표장에 안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진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돈과 물질을 추구하는 삶은 경쟁과 속도를 지향할 수밖에 없고, 가치와 여유를 추구하는 삶은 공동체와 나눔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운하 뉴스를 자기 투자정보로 활용하는 태도나, 법질서를 지키면 GDP가 5% 상승한다는 의식구조나, 사실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주장을 나름대로 펴 보는 이유는, 이 지면이 PD들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을 민감하게 맞춰야 하는 게 방송이지만 또한 그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방송이다. 방송의 소재나 주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점점 짧아지는 코미디 코너, 아침 일찍 편성된 드라마, 오락과 정보를 결합한 포맷, 이런 거 하나 하나가 사실은 사회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저 콘티와 원고에 충실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의식을 재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길게 생각하고 토론하면서 우리의 목표와 방법론에 대해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프로그램에서 인간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은 비인간적인 게 아닌지, 세상이 한 걸음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쩌면 PD들은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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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결혼을 한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가끔 후배들에게 듣는 이야기 중에 "도대체 뭐 먹고 얼덯게 사느냐"라는 경제적 여러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듣게 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는 나 역시 그 동안 딸이 둘이나 태어나고 학부형이 되어버린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비롭기조차 하다. 교회에서 노동사목 실무자로 일하는 나의 경우도 경제적으로 수입이 적고 아내의 경우는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수입이 거의 없어 네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언제나 빡빡하다.

보통 노동자들이 월급날이면 인상을 찌푸리고 우울하게 동료들끼리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려 애쓰면 다음날을 살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결혼 10년에 얻은 나의 결론은 가난하가 생존희 방법을 터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남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벌어서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규모와 수준을 낮추어서 살면서도 품위 있고(?) 절도 있게 사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나는 어떡해서든지 증명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실 그러한 생활태도를 가지게 한 것은 주변의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배우게 된 것이라 나는 그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얼마전 한 후배가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 아무리 없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후배는 당장 1백만원도 없었다.
나는 후배가 기죽을 것 같아 내 경험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나는 결혼할 때 잘 믿지 않겠지만 새살림이 하나도 없었어, 장롱, 텔레비젼, 옷장, 냉장고는 마누라가 집에서 혼자 쓰던 것 가져오거나 주변에서 얻어서 썼어, 새탁기는 아예 없어서 결혼 초기에 매일 손빨래하느라고 혼났어. 기계는 처남이 해주고 반지는 금 한 돈짜리로 끝냈고, 양복 외에는 아무것도 안 샀어. 결혼식 때도 비디오 안 찍고 친구가 사진 찍어주니까 좋더라. 요새 젊은 친구들 야외촬영이다 뭐다 해서 하루종일 억지로 모델 하려고 돌아다니던데 난 정말 그거 보기 안 좋더라. 신혼여행도 친구들이랑 버스 타고 돌아다녔어, 그래도 지금까지 사는데 내가 너무 없이 산다고 후회해본 적이 없어. 더 추억에 남더라고." 나는 내 생활의 경험을 과장해서라도 아무것도 없이 결혼하는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하는 후배가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너희들 당장 돈 없으면 지하방도 괜찮아, 나도 지하에서 7년 살았는데 살만 하더라고, 헝그리 정신 있잖아. 배고픈 사람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맛을 알 수 있다고, 집안 어른 덕보면서 자기 손 까닥하지 않고 도움 받아 결혼하는 사람들보다 주변의 선, 후배가 한데 힘을 모아 결혼을 준비하는 너희들이 휠씬 멋있는 부부가 될 거야."라며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써 보았다.

사실 그렇다. 자신의 삶을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하겠다고 작정한 바에야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다. 어느 한구석이 비어있어야 그 비어있음으로 다른 사람을 채울 수 있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도 생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누는 마음이 더 크고 자연스럽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동사목에서 가까운 노동자들이 결혼할 때 보면 현장에서 아무리 오래 근무했어도 전세방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무것도 없는 이들에게 결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걱정하며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다.

어느 여자 후배가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자신이 버는 돈을 고스란히 바쳤고 오히려 집안 빚까지 갚아가면서 살아갔던 성실한 노동자였다. 결혼을 앞두고 그는 막막해서인지 얼굴이 항상 우울했다.

그는 노동사목에 찾아와서 아무리 없이 살지만, 그래도 방은 두 칸 짜리를 얻고 싶다고 했다. 왜냐하면 회사 친구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방 하나를 내어 줘 재워주고 싶다는 것이었고, 주변의 사람들의 경우 보통 방 두칸을 얻어서 사는데 자신의 경우 지금까지 공장엘 다녔지만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더니 남편이 될 친구가 사는 좁은 한칸짜리 자취방을 새롭게 꾸며서 그냥 살기로 했다면서 그리고 자신들의 결혼비용의 일부를 지역노동 단체에 쓰기를 원한다면서 적지 않은 돈을 보내주엇다. 나는 그 후배가 참 대견했고 그 후로 그 후배의 그런 결단은 주변의 노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

사랑의 출발인 결혼마저도 자본주의의 가치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대한 익숙함과 소유의 습관에 물들게 되고 하루하루 살다보면 불필요한 물건들이 쌓여가고 더 가지게 위해 애쓰며 산다. 드러나 그런 만큼 내가 꿈꾸었던 이상은 하나씩 늘어나는 소유만큼 잃어버리고 산다.

끊임없이 소유할 것인가.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행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갈등한다. 가난하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방법이 더 가치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결국 어떤 선택인가는 자신에게 달려있는 몫이다.

 
http://www.jsari.com/ 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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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 가끔씩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쯤, 착 감기는 소설이 있다. 일상 속에서 내가 캐치하지 못했던 내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작가가 풀어놓은듯하여 내 속속들이 보이는 소설이 말이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역시 그런 소설이다.

 

o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이다. p13.

- 나는 거짓말이 되어버릴 다짐을 하곤했다. 그냥 다짐만으로 끝나면 좋겟지만서도, 그 괴로움을 못 이겨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 선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좀 도와달라거나- 어떻게? 나도 모르는 방책을 상대방에게 요구해버리는 무대책이 이런 시기엔 나올 수 있다- 제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스스로의 바람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그 다짐이나 선언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 문장을 보자.

 

o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p13.

-어쩔 수 없지, 라는 체념,

 

o 누군가가 아름답다든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일이 나로서는 쉽지 않다.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불현듯 그 규정의 한 모서리가 대상과 어긋나는 듯한 불편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하여 대상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라든지 매력이 없는 건 아니라든지 하는 조잡한 이중부정을 각주처럼 달아놓고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식이다. p14.

-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쁘진 않은데 예쁜편이라거나, 객관적으로 미인형은 아니지만 주관적으로는 예뻐 보여라거나.

 

o 실연이라는 말에 나는 기습을 당한 듯 움찔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가 나를 떠났다는 단순한 사실이 새삼스레 상기되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독초처럼 쓰디쓴 고통의 싹이 쏟아나는 느낌이었다. p18.

- 찹찹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도 없었던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게 부당한가. 

 

o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p21.

- 하지만 그 무례를 용서해주고 내 고통을 묵묵히 받아줄줄 알았던 사람이 그렇지 않다면 어떠할 것인가. 충분히 그럴만한 관계에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그 무례함에 자신이 다쳐버렸다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으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면, 게다가 왜 지나간 사랑한테 화 한 번 못 내고 어설픈 자기한테 푸냐며 길길이 화를 낸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많이 서운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나오는 무례함을 용서하고 애닲아하는 것이다. 그것조차 되지 않은채, 상대방이 안스럽다거나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   

 

o 넌 그때 어땠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계속 숨을 쉬고 살 수가 있는거야? p21.

- 질문이 잘못됐다. 오히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거야, 가 맞다. 여전히 살아있지 않은가. 소설 속의 문장대로 그런 질문은 '충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p20)'니까.  

 

o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23.

- 나의 경우 '사랑-실연-업무몰입'의 반복이다. 우연일지 몰라도, 아니면 평소에 내가 일을 쌓아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연을 겪고나면 일거리는 항상 많았다. 오히려 고맙다. 그다음 수순은 '체력저하'인데,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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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5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연을 겪었을 때 일거리까지 많다면, 저의 경우라면 돌아이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네요. ㅋㅋ 보통의 경우, 전 실연의 아픔에 푹 빠져버리기 때문에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는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했거든요. 그래서 일도 거의 손을 놓고 지냈었죠. 얼마전에도 그랬구요.

이제 숨도 잘 쉬고, 밥도 잘 먹고,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다시 사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다시 실연을 당하면 그 땐, 또 모든 것을 멈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반복 -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

밤바다 2008-03-15 18:08   좋아요 0 | URL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 힘들지요. 아니 숨을 쉬고 있고 적은 양이나마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지요. 업무는 손을 놓게된다면 다른 이들에 피해를 주게 되니, '다행히도' 하게 됩니다. 죽으려면 남에게 피해나 주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 가끔씩은 죽고싶을 때 죽기 위해 업무를 매일 매일 확실히 끝내고 정리하며, 인수인계 매뉴얼까지 매일 업데이트 해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온건 일을 미루어놓는 게으름이 아닌가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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