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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블러드머니 ㅣ 필립 K. 딕 걸작선 3
필립 K. 딕 지음, 고호관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어릴 때 주말에 틀어주는 토요명화, 일요명화를 열심히 봤습니다. 그것 말고는 영화를 볼 길이 없었거든요. 극장에서 보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합니다만 돈이 없어서 갈 수가 없었죠.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때는 시청률이 아주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명절 때나 돼야 공중파에서 영화를 틀어줍니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 시청률이 영화 시청률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라더군요. 하긴 케이블에서 24시간 영화를 틀어주는데 굳이 공중파에서 영화를 볼 이유는 없지요.
그렇게 토요명화를 매주 보다가 블레이드 러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비가 내리는 미래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 건물 외벽에서 계속 나오는 일본풍 광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안드로이드, 그리고 룻거 하우어가 죽어가며 뱉어내던 절절한 대사. 영화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이(안드로이드는 전기 양 꿈을 꾸는가)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구해 읽으려 했을 때는 많은 과학 소설이 그렇듯 절판이더군요.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비싼 가격을 치르고 어렵게 구해 읽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꽤 되더군요. 황금가지에서 새로 펴낸 걸 읽은 후에야 그때 읽은 게 번역이 좀 이상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원작 자체에 정신없는 구석이 좀 있기도 했고.^^)
어쨌든 그때 이후로 필립 K. 딕의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몇 편 번역되지 않아서 자주 볼 수는 없습니다만.)
딕의 소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대단히 재밌진 않은데 그만의 독특한 맛이 있어서 좋아합니다. 두고두고 곱씹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정이 갑니다. 딕의 작품보다 재밌게 읽은 SF는 다시 읽는 일이 드문데, 그의 책은 두 번 세 번 읽게 됩니다. 지루하다고 느낀 책도 그래요.
닥터 블러드머니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초반의 어수선함이 지나가면 이야기가 재밌어집니다.
작품의 배경은 1980년대 초반입니다. 딕이 작품을 집필할 때는 미래라고 가정하고 썼는데 이 시점에서 보면 과거네요. 이런 경우 작가의 상상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면서 읽는 재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배경이 핵전쟁 이후의 세계라서 그런 재미는 없습니다.
1981년 무슨 이유에선지 핵폭탄이 떨어져서 세계는 파괴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힘겹게 문명을 재건해가며 살아갑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인물이 세 명 대두됩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그리고 신비한 능력을 지닌 야심가, 마지막으로 마음과 정신이 병든 사람. 이들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엮여 돌아가고 부딪치면서 결말이 나옵니다. 암울한 파국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네요.
딕 걸작선이 세 권 나왔는데(9권이 더 나올 예정입니다.), 한 권은 꼭 읽어보세요. 딕은 시간을 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