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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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구들과 연말이나 연중 모임을 할 일이 생기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구장에 가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으니 꽤 오랜 시간 당구장을 다닌 모양입니다. 당구를 한 번 쳐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당구대는 직 사각형이고 그 직사각형 정해진 틀 안에서 공으로 하는 게임이 아닙니까? 힘을 어느 방향으로 주고 회전을 어느 방향으로 주느냐에 따라 천만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습관적인 운동 혹은 행동은 시간을 축척하고 집적하면 효율적인 방법을 터득하거나 경제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또한 당구에는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인데 변수가 생기기도 합니다. 왜 당구 이야기를 구절구절 풀어놓기 시작했냐면 <나폴레옹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이 당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여기 세상은 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박과도 같은 스릴을 즐기면서 쾌감을 얻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화영화 몬스터에 등장하는 요한과  같이 악마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의장에 앉아 모든 것을 관장하고 조율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한 사람이 살해를 하고도 유유히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의 변호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것인데 그 편지의 내용이 <나폴레옹 놀이>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살인을 했지만 살인이 아닌 것으로 되어서 법정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지요 조감한다는 말처럼 한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는 것이에요 놀이란 건 말이지요.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이지요 마치 당구대의 공들이 회전과 힘에 의해서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돌아다니는 것처럼 말이에요

 

권태로움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따분함인가요? 지루한 일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듯이 오랫동안 벼루어온 일 그것이 치명적 살인일지라도 살인이 아니게하여 빠져나가는 놀이 판을만들지요. 권태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놀이란 것 혹은 도박이라는 것 승률이 낮을 때 그것을 극복할 때 얻는 쾌감을 위한 것이라고 해두어도 좋을텐데요 너무나도 익숙해지면 권태로워질 수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놀이꾼에겐 권태로움이 죽기보다 싫었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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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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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많은 씬 중에서 한 씬이 평양으로 피난간 선조 일행 중에 한 늙은이가 하늘을 보면서 고민에 휩싸인 장면이다. 많은 전투씬과 멋진 장면들이 있었지만 말이 없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이가 서애 유성룡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다음에 검색을하고서야 알았다.

 

임진왜란이란 말을 기억해보면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 국가의 의도된 교육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성웅이 필요한 시대였으니 말이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선조 그리고 광해군 그리고 이름없이 나라 앞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 정도를 생각하지 않을까?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겼고 선조와 광해군은 <조선왕조실록>에 흔적을 남겼고 수많은 민초들은 전쟁을 기록한 문장들 속엥 흔적을 남겼다. 전쟁이란 것은 몸으로 겪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 문장으로 모였다. 임진왜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 난중일기>일 것이고 다른 하나가 유성룡의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시경의 소비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문장에서 <징비>라는 단어를 꼽았다.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해 둠으로써 후일 또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한 경계를 한다/라는 의미다. 책의 내용도 임진왜란의 발발에서부터 전쟁 그 이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지옥같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그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징비록>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읽어보면 참담하다거나 비극적 혹은 절통함이란 이미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관리의 입장에서 쓴 전쟁의 기록이라 장면에 대한 서사보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에 치우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문 원문을 같이 볼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움이었으나  사실 한문 문장이 병기되어있었어도 유성룡의 소양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소용이 없다. 하지만 이런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한국어의 정서를 한자로 표기할 때 생각보다 많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 그 상황을 영어문장으로 쓴다면 완벽하게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한문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짤복 무미건조한 문장에서 육즙이 베어나온다. 수많은 장군들이 전사를 하고패주를 했다는 문장을 읽으면 그 밑에 있던 병사들의 이름없는 집단 전사의 이미지가 베어나오기 시작했다. 간단한 문장에 소설적 상상력이 조금 결합되었을 때 그 문장들에게서 눈물이 흘렀고 절통함과 애통함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문장의 이면을 거닐고 행과 행 사이 행간을 거닐면서 임진왜란의 중간을 관통할 수 있었다.

 

<징비록>을 읽고나면 이순신이 몸으로 써내린 <난중일기>가 궁금해진다. 난중일기의 문장은 들리는 풍문에 <징비록>의 문장보다 더 매마르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절제됨 속에서 한개인의 내면을 쓰다듬을 수 있을 것도 같고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록이 전하는 시선의 차이도 한 번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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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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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글을 읽었다. <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굳바이 이상> 이후 세 번 째 글인 <네가 누구든 ,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다. 가장 최근 작품이면서 김연수 읽기를 시작했던 이유가 된 책이기도 하다. '유령작가'를읽으면서 조금 당황했었고 '굳바이 이상'을읽으면서 이야기꾼 김연수를 만나게 되었다. '얼마나 외로든'에서는 손으로 톡 건드리면 이야기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마술봉을 가진 마법사 김연수를 만났다

 

이 마술봉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물건들은 스치기만 해도 자기에게 얽힌 이야기들을주절거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모양인지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주저리주저리 뱉어내는데 연속성과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무한한이야기의 타래를 풀어놓는다. 각자의 울림없는 이야기들이 일방향적으로 울려퍼진다.

 

김연수가 가진 마술봉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어쩌면 이 순간부터인지도 모른다. 수다스러워 보이는 이야기들을 시간성과 연관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배열하고 직조한다. 시간성과 연관성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만들어내는 옷감 안에서 독자들은 그 옭죄임을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마술봉에는 인정이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치명적으로 독자의 목을 죄는데 불나방처럼 독자들은 그 독배를 향해 뛰어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만든다.

 

이야기는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 나신이 드러난 할아버지에게 받은 유물과도 같은 사진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데 나와 정민은 할아버지와 정민의 삼촌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흐ㅡ러지게 피어나고 뒤에서 '그 누구의 슬픔'도 될 수 없었던 사나이의 이야기까지 거미줄처럼 얽히기 시작한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얽히기 시작하면서 옷감을 만들어낸다. 서서히 드러나는 넓은 면적의 옷감에는 빈틈이 없다. 이야기가 진행된 후반에는 '그 누구의 슬픔'도 될 수 없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할아버지와 정민 삼촌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그리고 그 누구의 슬픔도 될 수 없었던 사나이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한 인간이 겪어내야 했던 시대상으로 전이된다. 한 인간이 겪어야했지만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대표상에 대한 이야기로 집약되어 육면 큐브에 혹은 직조가 된 옷감에 그림을 퍼즐처럼 맞춰나간다.

 

한 인간이었으면서도 두 인간의 삶을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던 시대에서 모두이면서 하나이고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니었던 한 인간의 이야기는 개인이 겪는 문제를 넘어 사회가 겪어야 했던 대리적 희생제의의 기능도 함께 한다. 인성이 무너지고 다시 새로운 인성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살아가야 했던 한 사내의 이야기가 후반을 차지한다.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전체의 이야기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진공엠프로 소리를 증폭시키는 것처럼 시대를 증폭시켰다고 해도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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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말을 걸다 - 밥상에서 건져 올린 맛있는 인생찬가
권순이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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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말을 걸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사실 음식이 말을 걸어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생각해보자 말이라는 것이 의사소통을 하려면 서로 동종이어야하지 않을까 음식과 인간은 동종이 될 수 없으니 사실 말을 걸수도 들을 수도 없다. 뭐 굳이 말을 걸고 들으려고 노력한다면 보편성을 잃어버렸다고 사람들이 말을 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말을 뛰어넘은 어떤 것이 필요하겠지 동류감응이라고도 하고 뭐 교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시도해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교감을 시도하는 책이 바로 권순이의 < 음식이 말을 걸다>다.

 

권순이는 음식을 매개로 얽힌 이야기나 기억들 혹은 추억들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음식들이 가진 성향과 잘 버무려낸다. 추억이라 부르면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잡아두기에 적당한 사진을 추억이라며 보는데 사실 사진도 음식과 같다. 사진이 추억이 아니라 사진이 붙잡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된다. 그렇다면 음식은 어떤 식으로 추억을 불러낼까?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음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재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면을 생각해보자. 면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하고 스프도 있어야 한다. 기본 세 가지가 버무려져야 하는 것인데 스프 속을 들여다보면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글쎄 굳이 의미를 붙여보자면 식재료가 서로 만나서 한바탕 구르고 나서야 한 가지의 음식이 되는 것처럼 인생만사 다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사람과 감정들이 만나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권순이는 음식을 하면서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라는 것이 혼자 있을 때는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여럿이 함께 만나면 융화되어 그 집단과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무우- 본문에 이런 글이 있다. 그런데 무라는 것이 된장찌개에 들어가면 된장찌개 맛이 베고 고기짐에 들어가면 고기 찜 맛이 베고 생선짐에 들어가면 생선찜 맛이 베서 그럴 수 없이 맛있는 음식이 되더군요 그렇게 자기 색이 없는 듯하면서 다른 어떤 것과도 잘 어울리는 무의 성질이 참 배울만하지 싶습니다 -  같은 인생이되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권순이의 음식은 인간의 희노애락의 감성을 아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 상태에 따른 음식들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뭐 어떤 감정일 때 이런 음식을 만들어 먹어라는 식의 막돼먹은 안내는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풀어내는 맛을 이야기한 책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주는 좋은 영향이라고 할까? 단순히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음식이라는 것이 재료를 하나씩 집어 먹는게 아니라 한움큼 집어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권순이의 음식 이야기는 사모곡이다. 모든 음식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금은 계시지 않은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음식에 고스란히 베어서 나온다. 진한 육즙처럼 어머니에 대한 많은 그리움들이 음식을 버무리는 맛나는 (?) 양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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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 주석판 - 역사와 소설의 포옹
김탁환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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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벗은 인간 황진이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김탁환의 <나 , 황진이>는 대중판과 주석판 두 가지 형태로 출간되었다. 대중판은 김탁환의 글과 더불어 그림이 무장과 문장 사이에 배치되어 문자가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어 - 문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 그림을 통해 상상으로 재현해내는 -외부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 주석판은 김탁환이 써 낸 문장들의 속살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볼 수 있어서 내부로 집적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두 가지 책 중 이번에 읽은 것은 주석판이다. 김탁환이 창조한 황진이의 속살을 들여다 볼 대이다.

 

<나 황진이 > (주석판) - 이하 <나 황진이> - 의 첫 장을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주석판임을 상기시키는 각주 번호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요철처럼 솟아나있다. 흔히 주석이라고 하면 글을 쓰는데 도움을 받은 책의 제목과 페이지 저자등의 간략 서지정보를 기독해두는 것인데 박상륭의 일련의 소설들 -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 등에서 나타나는 주석들이 이러하며 간간히 박상륭의 사유의 단초들을 볼 수 있다 -의 주석달기에서 <나 황진이>는 벗어나 있다. 아니 그 넘어에 있다고 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럼 그 주석이 어떤 주석인지 보자

 

<나 황진이>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보기로 하자. 우선 첫 문장이다. '산빛 짙은 창에 기대어 잠을 청한 탓일까요'의 주석에는 이렇게 표시되어있다. 1) 서경덕의 <봄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성곽  밖이라 속된 일 없고/ 산빛 짙은 창 안에 자니 늦게 일어나네/ 봄 찾아 골짜기 시냇물 가 거닐면서 / 예쁜 꽃가지를 눈에 띄는 대로 꺾어보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그 위로 아득히 흘러가는 복사꽃잎처럼'의 주석은 34) 이백의 시 <산중문답>을 염두에 둔 듯하다 무슨 생각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구요/ 글세올시다 웃을 수 밖에요/물 다라 복사꽃잎  아득히 흘러가는데 / 이곳이 딴 세상 속세가 아니리오 그렇다 <나 황진이>의 주석은 책과 저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소개하고 있다. 주석판이니 주석을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다.

 

처음 살펴볼 것은 주석에 자주 등장하는 "~을 염두에 둔 듯하다'라는 표현이다. <나 , 황진이>의 서사 구조는 황진이가 허태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하는 구성이므로 주석이 달린 문장은 황진이의 이야기에 대한 주석이다. 즉 황진이가 '산빛 짙은 창에 기대어 잠을 청한 탓일까요'라고 말한 것은 서경덕의 <봄날>이라는 시를 생각하고서 한 말이다라는 것이 주석의 설명이다. 황진이가 정말로 '산빛 짙은 창에 기대어 잠을 청한 탓일까요'라고 말을 했을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 황진이>는 역사 속에 실존했던 황진이가 자서전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주석을 단 김탁환에 의해서 만들어진 황진이의 언사라는 점이다. 즉 김탁환이 소설 < 나 황진이>를 쓸 때 만든 문장을 시에서 유추해냈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주석의 요체다

 

두번 째 살펴볼 것은 주석이 대부분 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로운데 소설의 문장은 소설인 이상 허구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문집이든 , 어떠한 형태의 책에 남아있는 사실의 기록 -기록으로 존재하는 실재라는 의미이지 표면적 의미의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말하자면 감성과 느낌의 기록이라는 말을 써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 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허구적인 인물의 일대기를 재구성해낸 것이 된다. 김탁환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역사이자 시이고 소설인  작품을 쓰고자 했다. 시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문장은 시의 편린들이 소설의 문장이 되면서 서정성이 소설의 서사의 근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황진이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기생이며 가인(佳人)이다. 이름은 알려졌지만 황진이에 대한 것들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책이나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 즉 정사의 기록보다 "~카더라'식의 야사에 의존해서 재현해 낸 것- 많은 일화들 화담선생과의 일화 벽계수의 일화 기타등등 - 이 대부분이다. 황진이의 삶을 반추하고 되새기는데 있어서 황진이와 연관된 동시대 인물 동시대 역사서들의 문집에 나타나 이야기나 시들 그리고 역사적 기술들을 가지고 재구성한 것이 <나 황진이>에서 김탁환이 하려고 했던 작업이 아닐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신화를 벗고 인간 황진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쓰인 것이 주석에 등장한 시이며 문집의 기록들이다.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여 황진이를 만들어낸다.이렇게 드러난 황진이는 이제껏 우리가 알던 황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080314 완유세설령에서 유랑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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