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강영숙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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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 블루의 음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제 예상하지 못한 폭우로 비 맞은 개꼴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컴퓨터도 샤워를 했는지 말을 잘 듣지도 않습니다. 자신도 샤워를 했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모양인지 거의 반 쯤 쓴 문장들을 한 번의 삭제키로 모두 지우고 다시 시간을 이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유랑인이 이야기해 볼 책은 <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입니다. 사실 저는 한국 소설이든 외국 소설이든 잘 읽지 못합니다. 하도 못 읽어서 작년부터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는 사이사이에 소설을 하나쯤 의도적으로 그것도 한국 소설가들의 책들을 읽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법 많은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고 나와 맞는 이야기를 해주는 글장이들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게는 신선한 이름인 강영숙은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리나> 등을 출간한 글장이였습니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를 읽을면서 그 전작들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문장들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제게 잘 맞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강영숙의 소설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저를 끌어 당겼습니다. 빨강과 검정의 느낌은 극명한 대칭을 이루는 색이기는 합니다만 , 두 가지가 섞이는 접점에서는 검정도 빨강도 아닌 색이 만들어지는 그러나 밝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우울함 때문이었습니다. 코발트 블루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냉소라면 , 빨강과 검정이 합해서 만들어 내는 것은 우울함과 음침함이 합해진 음울함 정도였거든요. 저의 핏 속에 흐르는 음울함이 제목과 공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는 소설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서 9개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소설은 ‘스쿠터 활용법’이었는데 , 개인적으로 서사방식이 마음에 들었던 글입니다. 저는 서간체 혹은 대화체로 이루어진 글을 좋아하는데요. 서로 이야기하고 듣는데 집중하게 됩니다. 일방적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함께하는 몰입도 를 높여주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생각해십시오. 평서형 종결어미 ‘-다’가 주는 일방적인 마침의 이미지를..... 저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스쿠터 활용법’을 빼고는 문체가 대화체가 아니었습니다만 , 이번에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문장들이 모여서 뿜어내는 아우라가 저를 젖어들게 했습니다. 강영숙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조리 결핍에 내성이 생겨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를 살아가면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든 자기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전체적으로 풍겨내는 이미지는 우울함 가득한 음울함이라고 정의하면 전체를 포용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은희경의 냉소에서 조금 더 진행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강영숙의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에서는 단편들 속에서 사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일기를 쓰듯 웅얼거리면서 써내려간 서사는 긴장감이라든지 흥분을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독자들의 합치도- 흔히 씽크로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군요 - 를 조금은 더 끌어올립니다. 더 이상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사는 옆집 사람일 수도 독자들이 아는 어떤 인물일 수 있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강여숙의 서사는 바스러지기 직전의 살얼음 아니 잘 말라서 약간의 힘만 주어도 부서질 낙엽 같습니다. 살얼음은 부서지는 순간 물이라는 액성을 회복하지만 , 낙엽은 그저 먼지에 가까운 , 되돌릴 수 없는 끝장나는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음울함이 저의 감성코드와는 제법 잘 맞는 것 같습니다.대책없이 명랑하거나 대책없이 심각하거나 한 것들은 견딜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며칠 째 비가 오는 하늘은 이미 잿빛입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시린 하늘은 오늘도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는 그 시린 하늘을 볼 날이 오겠지요. 그 때까지 잘들 지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다른 책들을 보러 길 위를 걸어야 할 시간입니다. 유랑인 유랑의 길로 이만 가보려합니다. 가내 두루 평강하시고 지체 평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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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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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다들 잘들 지내고 계씬지요? 대책없이 덥기만 찔레꽃머리의 전야가 아닌지요. 설익은 여름이 이정도이면 농익은 여름의 더위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요즘입니다. 그저 햇볕 사이로 생기는 근르을 찾아 디뎌야 겨우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계쏙되고 있습니다. 이럴 땐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말입니다. 잠시 쉬어가도 조흘것 같더란 말입니다 유랑인이야 길이 있으면 그 길을 더디게라도 걸어가는 것을 업으로 살아왔던 자이긴 합니다만 덥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잠시 자리 깔고 앉아 어기적거려도 누구 한 사람 뭐라고 할 사람은 업습니다만 엉덩이를 붙일 때에는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이번 자리값으로다가 길 위에서 읽어왔던 <서라벌 사람들>에 대한 잡스러운 소회를 밝혀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경주에 가본 적이 있으신지요? 유랑인은 중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곧잘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첨성대며 , 보문단지며 경주의 곳곳을 돌아다녔던 기억은 있습니다만 무엇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는 어린 시절의 경주입니다만 , 다행히 최근에 다녀온 경주에 대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더란 말입니다. 아 그러니까 말이지요. 옛 사람들의 정취를 느끼거나 문화재를 볼 수 있어서 좋앗다는 것이 아니라 경주 박물관 옆에 보시면 연꽃밭이 있는데 시기를 잘 맞춰가면 흐드러진 연꽃을 볼 수 있지요. 그 꽃이 만개한 경주가 좋았더란 말입닏. 그리고 사금갑 어귀에서 마셨던 차의 기억도 좋게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심윤경이란 작가가 <서라벌 사람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를 이어 네번 째 소설집입니다. 연작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연작 소설이라고 하니 좀 생소한가요? <원미동 사람들> 혹은 <우리동네>를 기억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심윤경 작가의 책들 중에서 백미로 꼽는 것은 < 달의 제단>인데 말입니다. 대부분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최고로 꼽으시더라고요. 뭐 글을 읽는 사람의 취향 차이니까요. 그렇다고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가 싫다는 것은 아니랍니다.

 

<서라벌 사람들>은 광고 문구에 썬데이 서라벌이라고 씌여져 있습니다만 , 흔히 기억하는 썬데이 ** 류가 보여주었던 외설성과 에로티즘과는 거리가 좀 있어보입니다. 교합례 장면이 몇차례 나옵니다만 , 교합례는 이미 외설성을 뛰어 넘어 종교 제의로 자리잡고 있어서 경외적인 것이 되어 있습니다.

 

교합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 교합례가 등장할 때마다. 전통적인 것이 무엇인지 전통이 옛것이라고 하여 경멸되고 파괴되고 잘못된 것으로 낙인 박혀야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고유한 것이니까 말이에요 자생적 문화는 지켜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랑인은 일련의 글들 '연재태후'라던지 '변신'이라던지 '혜썽가'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편린들에서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보아야 했다면 비약이 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와 신교의 첨예한 대립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로 순행합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랑인이 제법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변신'입니다.  심윤경 작가가 <서라벌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 내세운 설정이 골품 중에서 성골을 거인족으로 설정한 것인데 , 변신의 주인공은 성골이 아닌 진골로 왕이된 자 김 춘추공입니다. 신화에서 인세로 내려 앉은 것이지요. 거인족이라는 설정은 필멸의 결말이긴 합니다만 생각해보시길 제우스 이전의 신들도 거인족이었으나 제우스로 넘어오면서 필멸의 길로 들어서지 않습니까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존재로 들어서는 뒷모습은 어떻겠느냔 말입니다 . 어쩔 수 없는 뒷모습은 슲픔니다만 승리를 쟁취해낸 사람의 최후도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님을 변신을 통해서 알아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춘추공의 죽음의 순간에 얽힌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슬픈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인간으로써 어쩔 수 없는 한계마저도 뛰어넘고자 했던 인간 춘추의 서글픈 모습입니다. 열패감이라고 해야하나요. 열등감이라고 해야할까요?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점혈된 모습으로 그려낸 심윤경의 춘추공은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영웅적 면모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영웅의 신화 속에 살지 못하고 인간의 열패감 속에서 살아야 했던 작은 한 인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슬픕니다.

 

<서라벌 사람들>을 읽을 기회는 예전에 한 번 있었습니다만 아직 완전한 인연이 아니었는지 <준랑의 혼인>까지만 읽다가 다른 이에게로 떠났지요. 그러다가 최근 다시 제 품 속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아 '준랑의 혼인'도 읽어볼만 하고 천관사 이야기도 읽어볼만 합니다. 엄숙한 역사의 한 편린을 떼어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 옷을 입히는 작업을 심윤경 작가는 재미있게 해낸 것입니다.

 

<서라벌 사람들>을 읽고 난 후 문득 <삼국유사>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서라벌 사람들>의 모티브가 된 것들이 <삼국유사>안에 다 있거든요. 여러분도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지만 유랑인도 언제 그것을 다 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완유세설령에서 유랑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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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미학 - 진동선의 사진 천천히 읽기
진동선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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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지금은 봄의 끝자락 이제 찔레곷머리가 시작되려고 하는지 제법 비가 내리는데 말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지요. 지체 평강들 하시고 가내 두루 평강하시고 봄처녀는 가슴에 바람이 일어 싱숭생숭하시겠습니다만 그 바람 잠 재울 남정네라도 만나 희희낙락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 그것도 궁금하고 마입니다.




  칼칼칼 봄바람 난 처녀와 가을바람 난 총각은 춘정과 추정이 동한 상대를 잊지도 못하고 상사의 병통으로 눈을 감아도 아른거려서 죽을 맛이겠지만 말입지요. 뭐 그것이야 춘정이나 추정이 동한 사람들의 몫이니 말입니다. 이들이야 사진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 유랑인과 같은 병통을 지닌 사람에게는 사진이라는 것이 요긴합니다. 유랑인의 병통이 무엇인고 하니 한 번 가본 곳 기억 잘 못하고 한 두 번 만난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지 못하는 안면인식 장애라는 것인데 말입지요. 사진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더란 말입지요.




  웬 봄 처녀와 가을 총각이야기를 들이밀며 생뚱맞게 사진이야기를 풀어낸 것은 말입지요.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써 내린 < 한 장의 사진 미학>의 말머리라고 말한다면 이 문장을 겨우 며칠씩이나 입 속에서 웅얼거리고 있었느냐고 우매하다 반편이라고 나무랄 분들이 계실 것으로 아오나 유랑인의 깜냥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더란 말입지요. 진중함이나 무게감 있는 이야기는 지나가던 구자(狗子)에게나 줘버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 말고 다른이들이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글들을 뱉어내실 것이라 믿고 해보는 소리입지요.




  <한 장의 사진 미학>은 진동섭이라는 사진평론가가 쓴 글들을 엮은 것인데 말입니다. 진 선생이 고른 사진을 유려한 문체로 소개를 하는 책이었더란 말입니다. 칼칼칼 유랑인은 평론가들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말입니다. 뭐 그 흔한 문학 평론가들 -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다지 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여타간의 예술의 장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일군의 예술을 만들어 내는 작가군과 작가군의 의도를 파해치거나 곡해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버리는 평론가군이 존재를 하더란 것은 알았습지요. 평론가 중에 가장 귀에 익은 문학 평론가 김현 님이 있으시군요. <행복한 책 읽기>가 생각나는뎁쇼 칼칼칼 문학의 변방에서 명맥만을 유지하던 평론을 하나의 장르로 공고히 만드신 분이시라 하더이다. 그러나 꼭 이런 사람들은 절명이라 불꽃 같이 살기엔 이 세상 삶의 길이가 너무 길었읍지요.




  사진 평론가라는 직함은 참 생소한 직함인데 말입니다. 사진이라는 하나의 현상(現像)을 언사들을 부려서 작가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것 혹은 그 너머의 의미를 새로이 밝혀주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만 생경합니다만 그림 읽어 주는 사람이 있고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 문외한인 유랑인 같은 사람에게는 사진을 읽어주는 사람이 되겠습지요. 최소한 진동선이란 분은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습지요. 칼칼칼 다른 평론가들은 만나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만나본 - 읽어본 - 중에 최고입니다. 미학이라는 말을 괜히 부치신 게 아니더란 말씀을 드려두겠는데 말입니다. 발터 벤야민 ,  레비 스트로스 들뢰즈 등을 위시한 사람들의 인용이 가끔 나오는데 애법 책 좀 읽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더랬지요. 쉽게 하는 말이라도 그 사람들의 말의 가피 한 자락 얻어 듣지 못한 사람들은 가벼운 잽처럼 던진 문장에 어퍼컷을 맞을 수도 있겠다 싶더란 말입니다. 뭐 유랑인이야 이미 원 잽 맞고 케이오 당했더랬습니다. 칼칼칼




  한 장의 사진을 보고 , 사진을 읽고 , 사진을 느낀다는 세 가지 범주 안에서 많은 작가들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진동선의 글로 인해 말 되어진 것들은 새로운 생각의 켜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한단 말이지요. 사진이란 것은 말하게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유랑인의 생각인데 말입니다. 희안하게도 말하지 않아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이 아닐까 하는데 말입지요. 사진은 절대 말하지 않는 침묵을 통해서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같더란 말입지요. 원본이 있으면 무한 인화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사진들을 주로 찍으시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만 , 유랑인은 사람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찍어 버릇해서 참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기억하고 싶다는 말대신 사진을 찍어버리니까 말이지요. 게다가 사진이라는 것이 많이 보급된 지금에도 사진 속에 자신의 존재를 잠시 두어 이제는 부재하는 과거의 한 점에서 조차 존재했다는 흔적마저도 지워버리길 소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지요. 칼칼칼 




 

사진 전문가가 말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싱크로 100 퍼센트를 만드는 것은 아니어서 말입니다. 수 많은 사진 들 중에서 유랑인의 눈에 든 것은 <자화상>과 <인도>라는 사진이었습니다. 특히 <인도>라는 사진이 참 좋았는데 말입니다. 사람의 뒷모습이에요 아기를 안고 있는........ 뒷모습은 앞모습이 감추어둔 내면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 같아요. 뒷모습은 익숙하지 않은만큼 진실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그 사람의 모습을 알고 싶으시다면 그 사람의 뒷모습을 살펴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해 하고 있습니다만. 칼칼칼




090611 완유세설령에서 유랑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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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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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비가 내리고 난 다음이라 햇살이라고는 한 점 없고 스산한 바람이 농도짙은 잉크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계신 곳은 어떤지요? 이렇게 끈적이는 날에는 말입니다. 시 한 자락 읽어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 언어가 풀어놓은 감각의 편린들이 읽는 이의 감성과 달라붙는 점도가 높아지는 날이니까 말입니다. 칼칼칼

 

이번에 이야기해볼 책은 말입니다. 유랑인이 대학을 다니면서 처음 만났던 시인의 최근 시집입니다. 그 당시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외쳐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지요. 그렇습니다. 최영미 시인입니다. 최영미라는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듯 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실줄로 압니다. < 시대의 우울>>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지요. 그 최영미가 이 최영미 맞습니다. 시인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 놓더니 미술 이야기에 천착하다가 소설도 한 편 쓰시고 말입니다. 시와는 결별을 하실 것 같으시더니 오랜만에 시집을 냈단말입니다. 칼칼칼

 

뭐 시라는 것이 고정적이기는 하나 - 시인의 언어를 조합한 이상 고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유랑인의 아집입니다. - 시라는 것은 오독의 즐거움 또한 산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데 말입지요 사실 시만큼 장님들에게 효과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없더란 말이지요. 사실 시는 대답을 해주는 법이 없으니 생각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란 말이지요 생각나면 생각대로 하면 되고~~ 칼칼칼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말이지요 저기 평론에 이러저러하여 저러이러 하다라고 쓰고 있고 말입니다. 작가의 후기에서 내 시의 세계를 알아줘서 고마워 땡큐해라고 쓰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냥 빈정거리는 것이지요 뭘 사실 질투입니다만 유랑인은 절대 그렇게 못 읽었더란 말이지요

 

그나 저나 유랑인은 이렇게 <도착하지 않는 삶>을 읽었더랬습니다. -  이제부터는 유랑인의 오독이 시작되는 것이니 혹시라도 시인이 이 긍르 보더라도 웃기고 있네 인마 요러고 넘어가 주시면 좋겠단 말이지요 칼칼칼 - 시에 관심이 그다지 없는 유랑인이 보기에도 오랜만에 시집을 내셨더란 말이지요. 살짝 소설이며 미술이며 훑고서 말입니다 이제는 시를 접으신 줄 알았더랬지요. 그런데 홀연히 시집을 내셨어요 그 기분은 뭐랄까? 이런 기분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씁니다.

 

끝난 줄 알았는데 ......

그게 다시 시작됐어!

 

<중략>

 

그렇게도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중년의 기쁨> 中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 이걸 뒤집어서 이야기해보면 어떤 것을 그만둔다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더란 말입지요 칼칼칼 -오래 다른 것에 눈길과 맘길을 주다가 저 심연에 꺼진 줄 알았던 불씨를 다시 살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입죠. 한 번이라도 장작불을 아궁이 불을 피워본 자라면 알 것인데 말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말이지요 신선한 시각이 돋보여던 것인데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과 가까운 근경에 시선을주었던 시인이 말이지요. 이번에는 자신과 좀 더 멀어진 곳에도 시선을 주기 시작했더란 말이지요. 국지적 공간을 넘어섰다고 할까요. - 적당한 언사가 생각이 나질 않는데 말이에요 -  베이징 올림픽 이야기도 하고 촛불 집회 이야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여간 뭐라고 할까촘촘하게 짜여졌던 시 언어의 그물코가 성기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 성긴 그물에도 걸리 것들은 다걸려 시의 언어로 재배열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데 말입니다. 칼칼칼

 

문든 말입니다. 정희성 시인의 <시를 찾아서>가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최영미 시인도 시를 찾아서 떠난 여정이었더랬습니다.이렇게 씁니다

 

내게 웃을 힘이 남아 있으니

허망하게 죽지는 않으리

 

오~ 인생 , 너는 엉뚱한 곳에 시를 감춰두고

실패한 자의 오후를 위로하는구나

 

                                                                   <한가한 오후> 中에서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나의 여행> 中에서

 

 

최영미 시인은 뭐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일종의 통렬한 고해이면서 반성이 수반되어 따라오는 것이지요.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

여기에서 저기로

이 남자에게서 너 여자로 옮기며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젊음

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여기에서 저기로> 中에서

 

유랑인의 오독은 여기까지 입니다. 칼칼칼 많은 포스트 잇 나부랭이가 <도착하지 않은 삶을> 윤간하듯 할퀴었으나 그것은 유랑인 혼자만의 쓰잘데기 없는 객기이거나 허기이고 말입니다. 분석되어질 필요 없는 시에대한 일종의 모독이지 싶습니다........ 시를 미친듯이 할퀴어 봐야 유랑인만 미친놈이 될 뿐이지 말입니다. 그저 즐기시길 말입니다 . 그 때 그 때 달라지 마음에 한 문장 한 자락이라도 곁에 둘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더란 말이지요. 뭐 칼칼칼

 

봄날입니다. 봄날의 개나리처럼 산뜻하고 아름다운 하루 되식ㄹ 바랍니다.  완유세설령에서 유랑인 잡스럽게 씁니다. 아참 마지막 한 마디

 

"유랑인 잡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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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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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 신지 모르겠습니다. 입만 살아서 뭐라고 뭐라고 말만 많은 유랑인입니다. 잘들 지내셨는지요. 찔레꽃머리도 아닌데 날은 이리도 더운지요. 한여름이 되면 정말 어찌 살까 싶습니다. 저는 보통 방에 틀어박혀서 이런 저런 글들을 읽으면서 보내는데 말입니다. 본격적인 읽기에 앞서 준비 운동 삼아 읽어본 - 무척이나 궁생한 변명 같습니다. 사실 변명 맞습니다. - 책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웃다>인데 말입니다. 제목이 일단은 저를 끌었지요. 뭔가 끌리는게 있으니 읽은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좀 웃어 볼까하고 읽어보았더랬지요. 요즘 유랑인 스스로든 주위든 웃을 일이 없었답니다. 그러면 최소한 유랑인은 유랑인을 위해 웃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뭐 흔히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칼칼칼
 

정한아의 소설집입니다. 소설집이니 당연히 소설들이 묶여져 나왔습니다.  8편의 글들을 모았어요. 표제작인 <나를 위해 웃다>를 시작으로 해서 <아프리카> <첼로 농장> <마테의 맛> <의자> < 댄스댄스> <천막에서> <휴일의 음악>까지인데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들입니다. 잠시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보다는 카라멜 마끼아또나 카페 모카를 한 잔 하면서 눈이 아리지 않은 햇살 한 줌 타서 읽으면 좋을 글들인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라도 ~ 것 같아요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중인데 말입니다.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는 무득 튀어나오는 언술이랍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유랑인이 오독한 것이겠거니 생각하시라는 것이기에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비겁함이기도 합니다. )

 

각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차미령의 해설에 잘 나와 있으니 유랑인이 가타부타 할 말이 없습니다. 이야기들을 부수고 그 편린들을 작위적 -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그러하겠지만 그 논리를 뒷받침 할 수 없는 문장들은 가차없이 절제되고 필요한 것들만 가져와서 이어붙이니 작위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못된 습관입니다. - 으로 배열해서 설명을 해두었으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유랑인은 해설 읽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꼭 제가 잘 못 읽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야기는 읽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 유랑인의 생각이거든요. 그 이야기 속에 하고 싶은 말들을 숨겨두는 것은 글쟁이들이 할 몫이고 말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다행인 것이고 다른 길로 빠져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글들을 읽고 무엇인가 생각했던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 잡스러운 글을 쓰고 있는 이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덟 편의 글 중에 여성 주인공이 여섯 편이고 한 편은 성별을 알 수 없고 한 편은 남자 주인공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구요. 정한아의 나이대에 쑬 수 있는 감성들을 가지고 썼다고 말하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정한아의 분신들 혹은 편린들 조금씩은 다 투영되어 있는 듯 합니다.

 

위안하는 글쓰기 , 20대를 살고있음을 견디는 글쓰기를 한 정한아의 고백은 나이가 들고 시간의 영속성 앞에서 좀 더 영글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랑인이 읽기에 20대의 정한아가 풀어낸 이야기는 이미지들을 스케치하는 느낌이었답니다. 이제 30대의 정한아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간의 중력성에 도움으로 정한아의 이야기는 채색이 된 그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길 바라구요. 소설하기는 지난한 작업이니까요. 일생을 걸고 해 나가는거지요. 그 끝은 봐야되지 않을까 합니다.

 

 

칼칼칼 완유세설령에서 유랑인 잡스럽게 씁니다.

0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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