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풀이 눕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무의식 중에 생각난 것은 김수영의 유명한 시 한 구절이었다. 글을 읽어가면서 나는 여자 주인공이 알콜홀릭이 되어가며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술에 취해 사랑에 울었던 K를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술을 마시고 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K였다. 결국 그 사랑을 찾아 떠나갔다.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시간을 보내는 소설가인 나는 도시를 걷는다.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걸으면서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멈출 수 없는 행위다. 정주하지 않는 것 , 도시는 그랬다. " 도시는 거대했다. 아니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눈을 가린 빌딩들 너머에 뭐가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13 쪽)" 나에게 도시는 거대했지만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먼지만 가득한 공간이다.

 

  도시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나만이 그들을 유리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난 아무것도 아닌 동생의 쓰레기통에 불과 (23쪽)했지만 나는 돈을 경멸하고 동생의 옷을 팔아 돈을 만들어 쓰고 동생에게 갈취를 일삼는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소설가인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속물처럼 보일 뿐이다.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아까운 시간을 돈을 버는데 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소설가인 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긴 한다. 돈이 없으면 배고프고 배가 고프면 굶어죽을 것이고 그러면 사랑도 끝이라는 것을 말이다. 절절한 사랑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도시를 떠돌다가 등에 매혹되어 한 사람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고 그 집에서 죽은 화분과 남자가 화분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를 풀로 명칭한다. 여자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독자는 알 수 없고 풀만이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둘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글을 쓰는 소설가라는 예술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보기 좋게 부정해버린다. 문학 행사에 초대되어서는 문학판을 엎어버리고 갤러리에 초대되어서는 그 갤러리를 초토화시킨다. 예술이란 판에서도 주류가 있었고 비주류가 있었다. 풀과 소설가인 나는 비주류였다.

 

  둘은 사랑을 한다. 사랑하기에 몰입하면서 돈이란 것은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가인 나는 풀과 떨어지기 싫어했고 돈이 필요해 일용직에 나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돈 때문에 싸운다. 사랑과 생계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사랑도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영혼적인 사랑이란 애초에 없다. 인간 세계에서는 몸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 다르다. 나와 풀의 사랑은 처절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을 선택하고 시작이며 목적이고 결과인양 사랑하지만 결국 그들은 영혼의 사랑이 아니라 한 단계 아래의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설가인 나는 자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사랑이란 것이 몸의 사랑만큼 드러나는 것인지를 의심해야한다. 누구도 영혼의 사랑이 몸의 사랑보다 선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독한 집착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사랑도 끝은 있게 마련이었다.  소설가인 내가 풀의 그림을 망쳐버렸을  풀은 테라핀을 온 몸에 두르고 불을 붙이라고 라이타를 소설가인 나에게 건넨다. 풀은 그렇게 나가버리고 소설가인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자신들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다.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그네들이 하는 말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장례식장이었다. 풀은 그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남은 그림도 모두 태워버려야 했다고 말한다. 며칠 뒤 소설가인 나와 풀은 예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곳으로 가서 어두운 저녁 불을 피우고 사랑을 나눈다. 풀이 눕는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불이 눕는다. 김수영의 풀은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지만 김사과의 풀은 일어나지 않는다.

 

 <풀이 눕는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독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르게 만드는 서사를 가졌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생각나기도 했고 - 내용의 상관성이 아니라 집착의 면에서 - - 또한 <감각의 제국>이라는 영화도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가학성과 폭력성이 수반된 에로티즘의 발현이라는 말이 불현듯 스친다.

 

<풀이 눕는다>를 읽다가 보면 침묵이라는 단어가 몇 번 쓰인다. 그것은 침묵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영화에서 대사 없는 침묵에 가갑다. 적막하고 공허한 외롭고 고요한 순간조차도 채팅의 귓말 혹은 귓속말처럼 처리된다. 2음절 낱말 속에서 억겁의 침묵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침묵하는 것도 모자라 서사의 중간 즈음에는 책 한 장을 할애해서 거대한 침묵을 만든다. 언어가 사용되지 않은 침묵은 거대하다. 그 침묵 속에는 존 케이지의 침묵 4분 33초와 같은 효과가 숨어 있기도 했는데 침묵의 순간에도 세계는 침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풀은 눕는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음악이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곡을 친절하게 각주로 달아놓기도 했다. 음악을 앍지 못하면 몰입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음악과 글이 공존하는 것이라 역시 글은 이미지화되어 영화의 씬을 만들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 글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음악들을 63곡 들었다.)

 

  며칠 전에 지나가는 기사로 2000년 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그리는 젊은이들은 비관적이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정확한 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김사과의 풀을 읽으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두 등장인물도 예술가라는 허울과 범주가 용인하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고 보았다. 지금 젊은이들의 사랑에 대한 단상은 그악스럽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소설가 나와 같은 인생들이 지금 도시의 한 귀퉁이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이며 젊은이였던 우리들이고 지금 현대인들인 것만 같아 갑갑해지고 울먹여지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영미의 글을 또 읽는다.<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라는 책 제명은 그 단어의 조합에서부터 인간의 내면을 엿보고싶은 관음의 심리를 자극한다. 비밀스럽게 드러내지 않은 것을 아무도 모르게 본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기쁨이 솟구치게 한다.
 

  꽤 오랜 시간 일기를 써 왔다고 밝힌 최영미 씨는 일기가 자신의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언사만으로도 세인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에는 적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내용이 일기가 아니라 책의 제목에 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내 일기를 ......>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부분은 최근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고 , 또 한 부분은 예전에 발표된 책의 글과 새로 뽑아 엮은 글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우연히 내 일기를>을 읽으면서 가장 허망했던 것은 산문집 안에는 일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편의 글들마다 일상을 담고 있었지만 이 글들은 최영미 씨의 일기장에 쓰인 글들이 아니라 어느 지면을 통해 발표된 칼럼 원고들이다. - 이 것은 글의 말미에 밝혀둔 지면과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 세상에 발표된 원고들을 우리가 일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일기는 그대로 원고일 뿐이다. 그 순간 글에서 자신은 사라지고 그저 읽히기 위해 생산된 글이 되고 만다. 일기의 내밀한 심리 , 심리의 속내를 기대한 내게는 매우 아쉽다. 공선옥 씨의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 어쩌면 나는 최영미 시인에게 소설가보다는 좀 더 풍성한 내면을 바랬지도 모르겠다. 최영미씨는 보기 좋게 그 기대를 무너뜨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건조한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 가까운 느낌들이다.

 

  속내를 보지는 못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 최영미가 어떤 식으로 생활을 하는지 시인이며 문학 작가라는 신화를 벗겨낸 인간에 대한 탐사는 가능하긴 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최영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다. 축구를 매우 좋아하고 조카라면 두말없이 달려가는 30~40대의 시인 최영미를 만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돈밖에 모르는 천민이라고 선언한다. 살아보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저 단호함이 문장과 삶 속에 그대로 베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에 들어앉아 외부 출입을 자제하며 지낸지 이 주가 지나가고 있다. 특별히 볼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지만 ,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그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만성적 우울 때문이었다. 혹자는 가을을 타는 것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이불 속에서 번데기처럼 꿈적도 하기 싫은 날들이 계속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밥먹는 것과 보는 것 뿐이다. 보는 것은 능동성이 필요없는 수동성이 강한 것들 밖에 없다. 틀어두기만 하면 보는 사람의 생각은 아랑곳 없이 짜여진 각본대로 정해진 대사를 읊어주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수동성과 수동성에 수반되는 시간의 흐름은 정비례한다.

 

찬바람머리의 햇살은 사람을 밖에서 한 번쯤 걸어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따갑지 않고 간질거릴 것 같은 햇살은 생글거리기만 해서 문득 밖으로 나가 짧은 시간이라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적당히 익은 바다와 많은 시간을 견뎌내어 이제는 한산한 거리가 나를 그대로 받아줄 것만 같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할 때는 떠난자의 기록을 읽어봄으로써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시대의 우울>에서 유럽의 미술관을 돌며 유럽의 화가들을 이야기했던 최영미 씨의 최근작 <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를 읽는다.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나는 최영미 씨의 말에 동의한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두려움 뒤로 밀려드는 긴장감을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고생이 고생스럽지 않았는데 어느덧 나도 중년이라 체력이 딸렸다. 가방의 무게를 더느라 하나 둘 짐을 버'린다고 고백을 한 최영미 씨는 여행의 목적을 '나를 재생산하는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유라고 말한다. 최영미 씨에게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탈피이며 도피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일상적인 노동 속에서 살기 위한 개인이 만들어낸 믿음이다

 

문학과 예술의 언저리에 대한 고백은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남다른 생을 살아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드리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생이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예술가는 모두 불행하다는 신화가 성립하지" 에서 여과없이 드러난다.

 

이번 책은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이다. 이미 출간되었으나 희미해진 기억들을 다시 선정하고 재배열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조밀하고 아련하기만 한데 안타까운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최영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매래의 최영미의 흔적도 찾아지지 않는다. 조각들 과거의 조각들을 꿰어만든 누더기 같은 글들은 개인의 과거를 기억하기엔는 더할나위 없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누더기는 타인에게 그저 더러워지고 헤진 옷, 더이상은 입지 못할 옷일 뿐이란 걸 알았어야 한다. 현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과거는 그저 동물원에서 늙어가는 동물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른 잔치를 끝냈을 때 그 날카로움과 시대의 우울을 흥얼거리던 최영미의 글은 어디로 갔을까? 도착하지 않은 삶처럼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을 잊은 것일까? 돌아오는 길을 잊을 여행이라면 길을 잃을 필요는 없다. 길을 잊기 위해서 여행을 할 필요도 없다. 길 위에서 잠시 쉬면 그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리피쉬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테두리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정해진 테두리가 크든 작든 간에 그 속에서 책임지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소명되어졌다고 생각하는역할을 하면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다. 사람들의 행동은 작은 편린이 되어 아퀴에 맞게 돌아간다. 시간은 그 많은 편린들이 산개해서 줄지어선 것의 거대한 통칭이다.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약간의 변주 가능한 사람의 삶들이 즐비하다.
 

  사람의 삶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지향하고 싶은 삶이 있을것이고 대중적으로 지양하고 싶은 삶들이 변주 가능한 폭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변주를 읽는 것은 테두리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테두리는 집단적 환상성을 가지고 있거나 집단 최면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서 묵인 되는 곳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곳에 대한 성찰은 테두리를 벗어나 절시(竊視)하는 이안(異眼)이 필요하다.

 

  <젤리피쉬>에서 해이수는 전작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진행했던 일련의 글쓰기를 통해서 환상성과 추상적 몰이미지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 낸다. 일종의 이미지의 파괴이다. 환상성이 배제된 사실의 서사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이 사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해이수의 이번 글들은 전작에서 보여준 서사에서 한 발 앞으로 나가서 외면을 읽고 다시 그 내면으로 침참해간다.

 

  여러편의 이야기가 묶인 소설집인 <젤리피쉬>에서 가장 쉽게 읽혔던 단편은 ' 나의 케냐 이야기'다. 케냐 여행을 하면서 멘토같은 시인과의 대화에서 작중화자는 이미 사라지고 독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이야기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있었다. '너무 거대한 것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료한 이야기는 '탕탕외외'란 말로 전이되기도 했다.

 

  존재감이 바닥을 치는 놈들일수록 마음 속에서 설산을 품고 산다는 진실을 혹한의 설산에서 한 번쯤 세상을 발 밑에 두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산병 입문)것은 당연하다. 존재감이 테두리를 안에서 인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존재의 부피가 테두리 안을 넘어 거대한 것으로 진행했기 때무이다. 테두리 안의 극소의 것이 극대의 존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너무 크면 잘 안 보이기 마련'(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시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얼룩말이 검은 바탕에 흰 무늬인지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인지로 설왕설래하는 윤간사의 이야기에서 백인들은 흐니 바탕에 검은 줄이라고 하고 흑인들은 검은 바탕에 흰줄(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명징한 답을 끌어낸다. 모든 것이 명료해야하고 명징해야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윤간사에게 '각자의 태생과승성이 있는거에요 기린에게 왜 목이 기냐고 묻지 마세요. 철수에게 왜 만년설을 보고 싶으냐고 묻지 마세요 기린은 목이 길게 태어났고 철수는 만년설이 보고싶은 거에요 그런 겁니다.'(나의 케냐 이야기)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동행하던 시인은 '의미를 찾지 말고 부디 재미를 찾게'라는 말을 던진다. 의미란 것은 정형화되고 객관화된 껍질이다. 테두리 안에서는 격식이라는 허울이 인간을 지배한다. 재미없는 세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허구 속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꼴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라고 말했던 헤세의 말처럼 .......... 우리는 떠나야 사는 삶들일 수 밖에 없다. 자기 존재의 허울에서 한 발 떠나보기를 여행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해이수의 글쓰기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작품은 '절정(絶頂)이다. 말그대로 목이 잘리는 순간의 기록이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은 시간을 부정하고 지금이며 과거이기도 했고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정지하는 존재가 적멸의 순간으로 넘어가는 허무의 시간이다. 전장에서 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을 묻는 나에게 '인간 최대의 투쟁은 바로 자기와의 대결이네 그 자기와의 대결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 그것이 인가닝 짐승과 다른 유일한 차이점' (절정)이라고 말한다. 왕의 이런 의지는 죽은 다음에도 혈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전재지는데 시간이라는 극대의 길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의 영속성에서 인간의 한계성 필멸을 넘어선 것이다.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 <젤리피쉬>와 <마지막 꽃잎을 불에 던져 넣었다>는 해이수의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의 분위기를 잇는 해이수가 해이수일 수 있게 하는 소설들이다. 등장하는 에밀리와 벡스는 상처 투성이다. 젤리피쉬는 해파리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독성을 가진 촉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젤리피쉬는 역동성을 지니지 못한 수동성의 존재다. 에밀리의 존재가 딱 그러하다. 존재하고는 있지만 존의 의지에 따라 큰 바다를 유영해야하는 부유하는 존재다. 열 일곱 에밀리에게 삶은 비루하고 남루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순간만이 존재한다. 꿈도 없고 이상도 없으며 그저 존재는 허무한 에밀리다.  벡스는 약에 쩔어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돈만 모으면 다시 고향인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현실을 즉물적으로 살아가는 벡스는 에밀리와 같아 보이지만 벡스에게는 돌아가겠다는 꿈같은 꿈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벡스를 지탱하는 것은 그 허망한 꿈이다. 우리는 에밀리이기도 하고 벡스이기도 한 삶을 살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다들 한 계절 마무리 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찔레꽃머리의 바람은 마른 바람이 한 가득이더니 , 갈바람은 차기도 하고 습기도 제법 머금고 있어서 냉장실 젤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 바로 감기지요. 최근에는 '신종플루'가 유행이라고 하니까 좀 더 건강에 신경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야 유랑인보다 여러분 곁에 계시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더 잘 챙겨 주실텐데 혼자 호들갑을 떠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 주 동안 읽은 책은 <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한 책입니다. 신화 이야기꾼 , 혹은 번역가로 잘 알려진 이윤기 씨가 번역한 작품입니다.

 

  조르바에 대한 풍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 친견하기는 처음입니다. 카사노바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풍문만 무성했습니다. 지인의 말을 빌리면 남자들이 왜 조르바 조르바라고 연호하는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읽어보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지금 이 글을 한국에 발표했다면 한국의 패미니스트들에게 욕 많이 먹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성인 제가 봐도 조르바 옹 - 나이가 환갑이 넘으신 것 같으니 옹을 붙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 은 완전히 마초맨처럼 보였습니다. 조선시대 반상의 도를 논하는 양반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을 듯 합니다.

 

  조르바 옹은 여성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여성을 만나면 유혹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고 , 마성의 돈 후안 (혹은 돈 주앙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 희대의 카사노바와 어깨를 나란히 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여성에 대해서 인식은 좋지 않았지만 사랑에는 열정적이셨던 분입니다. 결국 같은 인간이라는 것까지 인정하시기도 하시지요.

 

  조르바 옹의 연대기가 여성 편력만을 내세웠다면 , 그리 좋은 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책이고 이야기였을테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이야기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나와 조르바 중에서 배운 식자의 전형인 나의 입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조르바의 거친 입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타인들에게 기억될 조르바 옹입니다.

 

  자르바 옹을 키운 것은 8할이 자유와 야성 2할이 여성에 대한 사랑인 것 같습니다. 여성을 사랑하지만 여성에게 목메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일을 하되 제도와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야성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좀 더 좋은 말로 포장을 해보자면 카리스마가 흘러넘쳐서 아우라가 되었다고 할까요.

 

  조르바옹의 연대기는 말이에요 짧은 부분이에요. 조르바옹의 젊은 시절과 청년기가 없어요. 나코스 카잔차키스를 만났을 때 나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나코스 카잔차키스와  알렉시스 조르바는 실존 인물입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지만 실존 인물이 존재하는 허구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살짝 바래봅니다. 저도 말년에는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더 좋은 것은 내 마음대로 해도 걸리는 것이 없는 공자가 말하는 그 상태 - 제가 보기에는 조르바 옹이 그 상태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