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풀이 눕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무의식 중에 생각난 것은 김수영의 유명한 시 한 구절이었다. 글을 읽어가면서 나는 여자 주인공이 알콜홀릭이 되어가며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술에 취해 사랑에 울었던 K를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술을 마시고 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K였다. 결국 그 사랑을 찾아 떠나갔다.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시간을 보내는 소설가인 나는 도시를 걷는다.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걸으면서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멈출 수 없는 행위다. 정주하지 않는 것 , 도시는 그랬다. " 도시는 거대했다. 아니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눈을 가린 빌딩들 너머에 뭐가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13 쪽)" 나에게 도시는 거대했지만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먼지만 가득한 공간이다.
도시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나만이 그들을 유리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난 아무것도 아닌 동생의 쓰레기통에 불과 (23쪽)했지만 나는 돈을 경멸하고 동생의 옷을 팔아 돈을 만들어 쓰고 동생에게 갈취를 일삼는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소설가인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속물처럼 보일 뿐이다.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아까운 시간을 돈을 버는데 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소설가인 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긴 한다. 돈이 없으면 배고프고 배가 고프면 굶어죽을 것이고 그러면 사랑도 끝이라는 것을 말이다. 절절한 사랑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도시를 떠돌다가 등에 매혹되어 한 사람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고 그 집에서 죽은 화분과 남자가 화분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를 풀로 명칭한다. 여자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독자는 알 수 없고 풀만이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둘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글을 쓰는 소설가라는 예술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보기 좋게 부정해버린다. 문학 행사에 초대되어서는 문학판을 엎어버리고 갤러리에 초대되어서는 그 갤러리를 초토화시킨다. 예술이란 판에서도 주류가 있었고 비주류가 있었다. 풀과 소설가인 나는 비주류였다.
둘은 사랑을 한다. 사랑하기에 몰입하면서 돈이란 것은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가인 나는 풀과 떨어지기 싫어했고 돈이 필요해 일용직에 나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돈 때문에 싸운다. 사랑과 생계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사랑도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영혼적인 사랑이란 애초에 없다. 인간 세계에서는 몸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 다르다. 나와 풀의 사랑은 처절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을 선택하고 시작이며 목적이고 결과인양 사랑하지만 결국 그들은 영혼의 사랑이 아니라 한 단계 아래의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설가인 나는 자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사랑이란 것이 몸의 사랑만큼 드러나는 것인지를 의심해야한다. 누구도 영혼의 사랑이 몸의 사랑보다 선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독한 집착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사랑도 끝은 있게 마련이었다. 소설가인 내가 풀의 그림을 망쳐버렸을 풀은 테라핀을 온 몸에 두르고 불을 붙이라고 라이타를 소설가인 나에게 건넨다. 풀은 그렇게 나가버리고 소설가인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자신들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다.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그네들이 하는 말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장례식장이었다. 풀은 그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남은 그림도 모두 태워버려야 했다고 말한다. 며칠 뒤 소설가인 나와 풀은 예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곳으로 가서 어두운 저녁 불을 피우고 사랑을 나눈다. 풀이 눕는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불이 눕는다. 김수영의 풀은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지만 김사과의 풀은 일어나지 않는다.
<풀이 눕는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독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르게 만드는 서사를 가졌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생각나기도 했고 - 내용의 상관성이 아니라 집착의 면에서 - - 또한 <감각의 제국>이라는 영화도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가학성과 폭력성이 수반된 에로티즘의 발현이라는 말이 불현듯 스친다.
<풀이 눕는다>를 읽다가 보면 침묵이라는 단어가 몇 번 쓰인다. 그것은 침묵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영화에서 대사 없는 침묵에 가갑다. 적막하고 공허한 외롭고 고요한 순간조차도 채팅의 귓말 혹은 귓속말처럼 처리된다. 2음절 낱말 속에서 억겁의 침묵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침묵하는 것도 모자라 서사의 중간 즈음에는 책 한 장을 할애해서 거대한 침묵을 만든다. 언어가 사용되지 않은 침묵은 거대하다. 그 침묵 속에는 존 케이지의 침묵 4분 33초와 같은 효과가 숨어 있기도 했는데 침묵의 순간에도 세계는 침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풀은 눕는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음악이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곡을 친절하게 각주로 달아놓기도 했다. 음악을 앍지 못하면 몰입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음악과 글이 공존하는 것이라 역시 글은 이미지화되어 영화의 씬을 만들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 글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음악들을 63곡 들었다.)
며칠 전에 지나가는 기사로 2000년 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그리는 젊은이들은 비관적이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정확한 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김사과의 풀을 읽으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두 등장인물도 예술가라는 허울과 범주가 용인하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고 보았다. 지금 젊은이들의 사랑에 대한 단상은 그악스럽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소설가 나와 같은 인생들이 지금 도시의 한 귀퉁이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이며 젊은이였던 우리들이고 지금 현대인들인 것만 같아 갑갑해지고 울먹여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