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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피쉬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테두리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정해진 테두리가 크든 작든 간에 그 속에서 책임지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소명되어졌다고 생각하는역할을 하면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다. 사람들의 행동은 작은 편린이 되어 아퀴에 맞게 돌아간다. 시간은 그 많은 편린들이 산개해서 줄지어선 것의 거대한 통칭이다.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약간의 변주 가능한 사람의 삶들이 즐비하다.
사람의 삶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지향하고 싶은 삶이 있을것이고 대중적으로 지양하고 싶은 삶들이 변주 가능한 폭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변주를 읽는 것은 테두리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테두리는 집단적 환상성을 가지고 있거나 집단 최면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서 묵인 되는 곳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곳에 대한 성찰은 테두리를 벗어나 절시(竊視)하는 이안(異眼)이 필요하다.
<젤리피쉬>에서 해이수는 전작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진행했던 일련의 글쓰기를 통해서 환상성과 추상적 몰이미지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 낸다. 일종의 이미지의 파괴이다. 환상성이 배제된 사실의 서사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이 사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해이수의 이번 글들은 전작에서 보여준 서사에서 한 발 앞으로 나가서 외면을 읽고 다시 그 내면으로 침참해간다.
여러편의 이야기가 묶인 소설집인 <젤리피쉬>에서 가장 쉽게 읽혔던 단편은 ' 나의 케냐 이야기'다. 케냐 여행을 하면서 멘토같은 시인과의 대화에서 작중화자는 이미 사라지고 독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이야기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있었다. '너무 거대한 것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료한 이야기는 '탕탕외외'란 말로 전이되기도 했다.
존재감이 바닥을 치는 놈들일수록 마음 속에서 설산을 품고 산다는 진실을 혹한의 설산에서 한 번쯤 세상을 발 밑에 두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산병 입문)것은 당연하다. 존재감이 테두리를 안에서 인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존재의 부피가 테두리 안을 넘어 거대한 것으로 진행했기 때무이다. 테두리 안의 극소의 것이 극대의 존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너무 크면 잘 안 보이기 마련'(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시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얼룩말이 검은 바탕에 흰 무늬인지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인지로 설왕설래하는 윤간사의 이야기에서 백인들은 흐니 바탕에 검은 줄이라고 하고 흑인들은 검은 바탕에 흰줄(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명징한 답을 끌어낸다. 모든 것이 명료해야하고 명징해야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윤간사에게 '각자의 태생과승성이 있는거에요 기린에게 왜 목이 기냐고 묻지 마세요. 철수에게 왜 만년설을 보고 싶으냐고 묻지 마세요 기린은 목이 길게 태어났고 철수는 만년설이 보고싶은 거에요 그런 겁니다.'(나의 케냐 이야기)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동행하던 시인은 '의미를 찾지 말고 부디 재미를 찾게'라는 말을 던진다. 의미란 것은 정형화되고 객관화된 껍질이다. 테두리 안에서는 격식이라는 허울이 인간을 지배한다. 재미없는 세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허구 속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꼴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라고 말했던 헤세의 말처럼 .......... 우리는 떠나야 사는 삶들일 수 밖에 없다. 자기 존재의 허울에서 한 발 떠나보기를 여행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해이수의 글쓰기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작품은 '절정(絶頂)이다. 말그대로 목이 잘리는 순간의 기록이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은 시간을 부정하고 지금이며 과거이기도 했고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정지하는 존재가 적멸의 순간으로 넘어가는 허무의 시간이다. 전장에서 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을 묻는 나에게 '인간 최대의 투쟁은 바로 자기와의 대결이네 그 자기와의 대결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 그것이 인가닝 짐승과 다른 유일한 차이점' (절정)이라고 말한다. 왕의 이런 의지는 죽은 다음에도 혈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전재지는데 시간이라는 극대의 길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의 영속성에서 인간의 한계성 필멸을 넘어선 것이다.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 <젤리피쉬>와 <마지막 꽃잎을 불에 던져 넣었다>는 해이수의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의 분위기를 잇는 해이수가 해이수일 수 있게 하는 소설들이다. 등장하는 에밀리와 벡스는 상처 투성이다. 젤리피쉬는 해파리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독성을 가진 촉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젤리피쉬는 역동성을 지니지 못한 수동성의 존재다. 에밀리의 존재가 딱 그러하다. 존재하고는 있지만 존의 의지에 따라 큰 바다를 유영해야하는 부유하는 존재다. 열 일곱 에밀리에게 삶은 비루하고 남루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순간만이 존재한다. 꿈도 없고 이상도 없으며 그저 존재는 허무한 에밀리다. 벡스는 약에 쩔어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돈만 모으면 다시 고향인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현실을 즉물적으로 살아가는 벡스는 에밀리와 같아 보이지만 벡스에게는 돌아가겠다는 꿈같은 꿈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벡스를 지탱하는 것은 그 허망한 꿈이다. 우리는 에밀리이기도 하고 벡스이기도 한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