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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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유난히 여러 소설이 떠올랐다.


첫째로는 왠지 비슷한 타입으로 보이지만

스토너와는 다르게 성공한 인생에 낄 법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


이어 곧 떠오른 것은 배수아씨의 프린세스 안나.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그 인생의 모습이 화가건 주유원이건 상관없는 것이다.

대략 이 비슷한 문장.


그레이스에 대해서는 저지대의 벨라가 떠올랐더랬다


그리고 후반부, 스토너가 점점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땐

아주 오래 전 수업으로 들었던 빌 비올라의 영상작업이 떠올랐다.

본인의 어머니의 임종과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설치했다는 그 작업물.


요즘 들어 자꾸 하게 되는 생각이 있다.


대체 왜 견디는 걸까. 어떻게 견디는 걸까.


처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이 가족들 틈에서

자신에게만 몰리는 그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왜 견디고 있는 건지


그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왜 서로를 견디고 있는 건지


이 모든 게 가족이라는 이유로 설명된다면 대체 가족이 뭔지


가족이란 게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피와 태어남이 나온다면

대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는 의문.


그러다 결국에는 '그래서 왜 버티고 있는 건데' 라는 의문으로 돌아오고 만다.


답은 없다. 늘 그렇듯 답은 없다.


허나 예전과 조금이나마 달라진 생각으로 말해보자면


한 두 가지 하고 싶은 작은 것들 때문에 버티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사고 싶은 책이 있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고

무엇보다 지금 그리고 있는 만화를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쉬는 날이 쉬는 날이지 못 하고 작업날이 되어버리는 지라 체력이 배로 탕진되지만

아마 그래서 버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각자 다 버팀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꿈으로.

언젠가는 승진할 욕심으로.

누군가는 다음 달 보러 갈 공연 생각에.

혹은 다음 달 구매할 갖고 싶던 물건들 생각에.

이렇게든 저렇게든 버텨가는 거겠지.


스토너의 이야기가 유난히 감동적인 이유는

아마 버팀의 기록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간 소설이나 기타 장르에서 보여왔던 '버팀' 의 이미지가

태어나기도 불우하게 태어나 폭행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버티는 축이었다면


스토너의 버팀은 좀더 지금, 나 에게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더 감동적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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