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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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 제 8장

도무수유 道無水有 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물이라는 것이지요.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若 같을 약, 爭 다툴 쟁)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故 예 고, 幾 기미 기)

상선약수 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 玄德이며 도 道입니다.

물은 물록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로 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무리 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無理: 이치에 맞지 않거나 알맞은 정도에서 벗어남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되는 것을 노자는 ‘쟁 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 全國爲上 파국차지 破國次之 (全 온전할 전, 破 깨뜨릴 파, 次 버금 차)’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은 (破國) 최선이 못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 (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 作爲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위 作爲: 의식적으로 행한 적극적인 행위

‘노자’ 마지막 장인 제 81장의 마지막 구가 ‘천지도 天地道 이이불해 利而不害 성인지도 聖人之道 위이부쟁 爲以不爭 (害 해칠 해)’ 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 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 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중략-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비천한 곳,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P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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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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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튼튼히 해야>
P279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使 부릴 사,盜 도둑 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구하기 어려운 화 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해 공산품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 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 없습니다.

- 중략-

외환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카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 貨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입니다.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腹 배 복, 骨 뼈 골)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심지가 타율신경계인 데 비하여 복골은 자율신경계이기도 합니다.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 無知無欲 (欲 바랄 욕) 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는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운동의 본질입니다.

P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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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는 거짓입니다.>

P273 ‘노자’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 爲는 인위 人爲, 작위 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P274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갖혀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제 2장) 제 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위 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위 僞입니다. 위 僞는 인 人과 위 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P276 (제2장)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중략-
성인이 본받아야 하는 이러한 작풍이 곧 현덕 玄德 이라는 것입니다.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눈에 띄지 않게 玄 일하는 德 스타일이지요.

(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恃 믿을 시, 宰 재상 재, 謂 이를 위)

‘생지축지’는 낳고 기른다는 뜻으로 그 다음의 ‘생이불유’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위이불시’ 는 ‘장이부재’ (위 사람이 되더라도 지배하지 않는다) 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P277 노자는 이 장 (제2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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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닙니다.>

P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 無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 無名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 이 양자가 서로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지요

P270 노자의 도와 명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되는 것이지요.

노자의 무 無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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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P249 맹자 이루 상 離婁 上 ( 떠날 이, 별이름 루)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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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