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P236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양)으로 큰 것(소)을 바꾸라고 (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중략- 그런데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있습니까?

P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見, 만나고 友, 서로 안다 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중략-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 중략 -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 중략 –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에서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서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P242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 (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서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하기 어려워한다>
P243 盡心 上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 魯 (노둔할 노) 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 太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 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 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일월 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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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